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출근길 아침 올림픽공원 안. 도로 위로 차가 지나가는 조그만 터널을 걸어 나가자 갑자기 흑인 선수 여러 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민머리에 검은 얼굴, 날렵하게 잘 빠진 몸과 다리. 완벽하게 만들어진 인체 조각품을 보는 느낌이었다. 잠실과 올림픽공원 일대에서 벌어질 중앙일보 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하는 아프리카계 마라톤 선수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한국인 안내로 현지 컨디션 조절을 위한 로드웍에 나선 모양이었다.

그들을 가까이서 본 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어떻게 저런 몸을 갖출 수 있을까. 한눈에 봐도 우리 선수와는 다른 체격과 몸매를 갖고 있는 것이었다. 인간이기보다는 잘 다듬어진 기계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42.195㎞의 긴 마라톤 코스를 거침없이 완주하기 위해 잘 준비된 듯했다. 내딛는 보폭은 새 깃털처럼 가볍게 보였으며, 어떠한 한계 상황에서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결기가 느껴졌다.

이들을 보면서 일본의 세계적인 작가인 마라톤광 무라카미 하루키의 회고록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100㎞ 울트라 마라톤을 뛰고 난 뒤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오로지 앞으로 나갈 뿐이다”고 토로한 작가의 멘트가 떠올랐다. 기계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며 엔진을 가동하는 것처럼 인간의 몸도 작동할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아프리카 흑인 선수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놀라움이었다.

우연히 로드웍 모습을 본 뒤 며칠이 지난  일요일 아침, 중앙일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이들을 TV 중계를 통해 지켜보게 됐다. 이들은 당초 생각한 대로 강한 마라토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다른 선수들은 애당초 이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초반부터 아프리카계 선수들이 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케냐의 제임스 쾀바이는 중반 이후 선두로 나서며 2시간6분25초의 기록으로 우승, 대회 3연패에 성공했다. 같은 케냐의 마크 코릴은 2시간7분5초로 2위를 했다. 아마도 이들은 로드웍 때 본 선수들 가운데 있었던 듯싶다. 예상했던 대로의 결과가 나왔다. 이들은 지칠 줄 모르고 잘 달렸다. 마치 무한질주하는 기관차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강력한 동력을 잃지 않았다.

달포 사이에 조선일보 마라톤에 이어 중앙일보 마라톤대회 등 두 국제마라톤 대회가 잇달아 열렸다. 깊게 물들어 가는 만추의 가을 하늘에서 펼쳐진 두 마라톤 대회는 많은 엘리트 선수들과 동호인 선수들이 참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수만 명의 동호인 선수들은 엘리트 선수들과 직접 경기를 겨룰 실력이 되지는 않았으나, 풀코스 도전을 하나의 목표로 삼고 마라톤에 참가했다.

인간은 왜 마라톤을 하는가? 고대 그리스 마라톤 전쟁에서 승리한 병사가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뛰었다는 마라톤은 고대 올림픽 정신의 부활을 알리는 현대올림픽에서 핵심적인 종목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 주요 도시마다 대표적인 마라톤 대회를 하나씩 열고 있으며 매 대회에 수많은 마라토너들이 참가한다. 매년 한 번 정도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한다. “더 좋아지기 위해서 달린다. 개인의 최고 한계 상황까지 당신을 몰아넣어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인생의 은유법이다.” 인간의 한계에 대해 말하고, 그 한계를 어떻게 대면하고 극복할 것인지를 알게 하는 달리기는 자기 향상을 위한 길일 뿐 아니라 인간 존재의 길이라는 얘기이다. “대부분의 러너들은 더 오래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최대한 충만한 인생을 살고 싶어서 달린다. 여러 해 동안 멀리 떨어져 살고자 한다면 안개 속에서보다는 명확한 목표를 갖고 사는 것이 더 좋다. 달리기는 이러한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라고 말한 무라카미는 달리기를 통해 단련된 강한 인내심과 지구력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자양분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오늘도 인생의 고속도로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진다. 모든 이들이 항상 승전보를 알릴 수는 없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는 것은 자연적인 일이다. 마라톤도 순위경쟁에서 스피드 경쟁으로 변한 지 오래됐다. 무라카미가 지적했듯이 인간이 기계처럼 달리는 것에 환호하기보다는 마라톤 속에 내재해있는 가치의 의미를 새겨보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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