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논설위원, 시인)

 
“지루하게 끌고 가더니 이제 끝났네.” 지난 금요일 종영된 모 방송국의 일일연속극을 두고 아내가 한 말이다. 주변의 TV드라마에 대한 반응, 현실에 어울리지 않은 주제로 사회생활의 상식선을 허물어뜨린다느니, 시청률 경쟁에 매달려 막장 드라마를 스스럼없이 연출한다느니 지적이 많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드라마를 애청하는 것은 그 시간대에 마땅히 볼만한 프로가 없다는 현실도 드라마를 보게 하는 데 한 몫을 한다.

TV 등 대중매체는 영향력이 크다. 주부들이나 젊은 세대들이 TV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 사회생활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하다가 포털사이트의 기사를 떠올려본다. 바로 ‘대학생들이 존경하는 인물’ 기사이다. 몇 달 전 어느 전문 포털이 전국 대학생 813명을 대상으로 ‘존경하는 인물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정치, 경제, 사회분야별로 존경받는 인물을 올려놓은 내용이다. 이를 보면 현재 젊은 세대들이 선호하는 인물을 헤아리는 데 척도가 된다.

정치 분야에서는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전체 응답자의 18.9%로 1위에 올랐고, 사회 분야에서는 법정스님, 그리고 문화 분야에서는 김태호였다. 관심을 갖고 나머지 문화 분야에서 대학생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인물의 면면들을 살펴본즉, 영화감독 봉준호(12.4%),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11.9%), 소설가 공지영(9.3%), 영화감독 김기덕(8.5%) 순이다. 문화 면에서 문외한이 아닌 필자에게도 ‘김태호’란 이름이 생소하여 혹시 새누리당 국회의원 김태호인가 하여 살펴봤는데 그 사람은 아니었다.

궁금하여 인터넷에서 ‘김태호’를 검색하니 당사자는 문화방송의 프로듀서로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을 담당하는 PD였다. 올해 나이가 38세인 방송인인데, 방송사 PD인 젊은 그가 우리 사회에서 쟁쟁한 수많은 문화인들을 제치고 대학생들이 인정하는 문화인 가운데 존경하는 인물의 최고 반열에 올랐다니 그저 놀라웠다. 분명 특출한 재능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젊은 PD가 우리나라 대학생으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인사라는 사실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또한 김태호 PD나 양현석 대표의 이름을 지금까지 필자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은 본인 스스로가 예능프로 등 TV를 멀리해온 까닭인지도 모른다.

‘대학생들이 존경하는 인물’ 기사를 접하고 나서 필자는 포털사이트가 왜 이런 내용을 게재했는지, 또는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현실 판단의 단면이나 지향점을 떠나서 기초적 통계로서 일반적인 여론조사상의 신뢰도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포털사이트에 게재된 대학생수 표본을 갖고는 그 결과물의 신뢰성은 의문시되는데, 알려진 바로는 전국 대학생 373만 명(2012 교육기본통계)의 모집단 중에서 표본수 813명은 전체의 0.02%에 해당되어 표본이 모집단을 추측하는 데 무리가 따른다. 또한 표본의 추출 선정에 관한 객관성 있는 내용도 기사에는 나와 있지 않아 설문 과정의 타당도 등에서 유의미성(有意味性)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각종 여론 조사가 많고, 그 결과가 수시로 언론이나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통해 발표되고 있다. 어떤 여론조사에서든 모집단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표본집단을 정확하고 합리적으로 추출해야 그 결과물에 대해 객관성과 신뢰성이 보장될 수 있건만, 주변에서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는 부실한 조사로 인해 사실이 왜곡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러한 인위적 조작을 통해 사실을 호도하게 만드는 일은 믿음사회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문화 인물 중에서 국민으로부터 딱히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가라고 한다면 워낙 문화예술분야가 넓고 다양하여 속단할 수 없다. 올해 노벨문학상은 캐나다의 소설가 앨리스 먼로(82)에게 돌아갔지만,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결정되기 전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 고은 선생이 후보로 떠오르는데, 대학생들의 존경 인물 조사에서는 노(老)시인은 명함도 못 내고 있는 실정에 있다.

그런 사정에서 본다면 모르긴 해도 김태호 PD가 대학생들에게 크게 어필된 것은 ‘무한도전’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는 이 프로를 본 적이 없지만 다만 제목으로 봐서 젊은 세대들에게 무한한 도전 의식을 갖게 하는 진취적인 프로일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는데 무한도전은 젊은이에게 인기 있는 토요예능프로였다. 미래를 책임질 대학생들이 선택한 존경하는 문화 인물에 대해 호도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고만고만한 연예인들이 여럿 나와서 자기네끼리 말장난이나 신변잡기로 일괄하는 프로나 TV속에 비쳐지는 단편적 문화의 섭렵보다는 역사를 통한 더 큰 영역의 문화, 거대한 안목과 영혼이 깃든 문화적 상승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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