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다음 날

한기팔(1937~  )

헛디딘 발자국이
평생을 나를 속박했다.

오늘은
맑은 날.

한낮의 따스한 햇살이
덤불 속 풀씨를 풀 듯
꿈이 붉어

지난밤 허리 꺾인 바람이
그 속을 먼저 들춘다.
 

[시평]
비가 온 다음 날은 더욱 맑고 밝다. 비로 인하여 공기 중의 미세한 먼지들이 씻겨나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비가 온 다음 날은 먼 산이 더욱 청명해, 가깝게 느껴진다.
비가 오는 밤, 추적이는 빗소리로 잠은 백리 천리 밖, 멀리 달아나버리고. 다 잊어버린 듯한 지난날의 일들, 하나 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생각의 타래를 헝클어 놓고. 아, 아 그래서 언젠가 헛디딘 발자국, 평생 나를 이렇듯 속박을 하는구나 생각이 생각을 물고.
그러나 비가 그친 다음날. 세상은 밝고 밝아, 따스한 햇살 덤불 속 풀씨를 풀 듯, 꿈 또한 붉어지기도 하는데. 비록 지난밤 허리 꺾인 바람이 때때로 속을 들쳐 내기도 하지만, 비 온 다음 날.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하다는 생각, 따스한 햇살이듯 우리 품, 속으로 스며든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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