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주필)

 
사회주의 국가가 그들 내국인의 재판을, 그것도 고위 지도자급의 재판을 세계에 공개한 것은 그 연유가 매우 의아스럽다. 중국의 충칭(中慶)시 공산당 서기(書記)를 지낸 보시라이(薄熙來)의 뇌물수수와 횡령, 직권남용 혐의와 그의 부인 구카이라이(谷開來)의 살인 혐의를 밝히는 공개재판이 그 재판이다. 재판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광경과 사실들이 연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

중국의 지방 공산당 서기는 그 지역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는 그 지역의 절대 권력자다. 공산당은 고대나 중세 봉건 시대의 제후(諸侯) 시스템처럼 지역마다에 서기를 파견해 지역을 완벽히 장악하고 통제하는 ‘서기를 통한 가버넌스(Governance)’ 시스템이다. 그들 권력자들의 공사 생활은 일반인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권력의 아성, 비밀의 철옹성에서 이루어진다. 버트란트 러셀(Bertrant Russell)의 말을 떠올리면 보시라이의 재판을 감상하는 흥미로움이 더욱 진진해질지 모른다. 그는 말하기를 ‘거지는 자신보다 처지가 나은 다른 거지를 부러워할지언정 백만장자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Beggars do not envy millionaires, though of course they envy other beggars who are more successful)’고 했다.

버트란트 러셀의 말대로 봉건 시대 제후나 마찬가지로 우열의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높은 아성에서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 공산당 서기들의 공사생활을 언간생심 밑바닥의 일반인은 부러운 감정조차 일으키기 어렵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공산당 일당독재 시스템의 속성상 일반인으로부터는 초월적인 위치에 있다. 비교의 감정, 그로부터 일어나는 부러움의 감정은 서로의 사정을 잘 아는 엇비슷한 처지들에서 일어나기 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불가지(不可知) 불가시(不可視) 불가촉(不可觸) 영역에 대한 사람들의 탐구 열의가 말해주듯이 그들이 초월적인 위치에 있다 해도 그들 생활에 대한 일반인의 호기심과 궁금증은 포기될 수 없으며 도리어 부풀어 올랐을 수도 있다.

그 부푼 궁금증과 호기심을 다소라도 삭여볼 수 있는 기회가 중국의 거물 정치인이자 권력자인 보시라이 부부의 재판일 것이라고 일반인은 기대했을 수 있다. 과연 보시라이 부부의 입을 통해 쏟아진 내용들은 비록 본인에게 유리하게 또는 정략적인 고려에 의해 철저하게 여과(濾過)되어 나온 것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상상했던 것 이상의 요지경이었다. 따라서 재판은 일반인의 막연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는 차원을 넘어 그들의 호화사치와 타락상(相)에 대해 도리어 분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고 봐진다. 언론은 그 재판을 세기(世紀)의 재판이라 이름을 붙였다.

재판은 보시라이 본인의 요청에 의해 공개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시라이는 국가 지도자들의 공사생활과 일거일동을 샅샅이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만약 재판에서 이판사판으로 그것들을 까발리고 나선다면 부패에 대한 그의 혐의는 결코 보시라이 한 사람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 국가 지도자 전체가 ‘초록은 동색(草綠 同色)’이라는 식의 같은 부류로 유추될 수 있다. 따라서 중국 정부는 ‘돌을 던져 쥐를 잡고 싶으나 곁의 그릇이 깨지는 사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른바 ‘투서기기(投鼠忌器)’에 의해 그의 입막음을 조건으로 그의 공개 재판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 같은 막후 흥정이 있었음인지 재판에서는 보시라이가 다른 현역 고위 지도자들의 비리를 물고 늘어진 것은 없다. 대신 재판은 부부 간의 비방 공격과 난타전의 추한 무대가 돼주었다. 그의 부인 구카이라이는 보시라이의 철저한 부인에도 불구 그의 유죄를 주장하는 증언으로 보시라이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럼에도 공개 재판을 성사시켜 보시라이가 얻은 것만을 굳이 찾아본다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정도의 동정심이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 중국 정부는 공개 재판을 통해 부패 척결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과시했다고 자평(自評)한다. 그렇다면 일견 피차 윈-윈(Win Win) 같다. 하지만 중국 정부로서도 당장은, 쥐를 잡다 독을 깨버린 정도는 아닐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독을 깨지게 할 금을 독에 가게 해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는 중국의 케네디와 재클린이라 불릴 만큼 전도가 양양해보였다. 이들은 베이징대 재학 중 만나 사랑에 빠졌다. 보시라이는 아들 하나를 둔 기혼이었지만 구카이라이의 총명함과 매력, 미모에 푹 빠졌다. 둘은 보시라이의 이혼 후 부부로 결합했다. 진정한 일심동체를 맹약하듯 구카이라이는 남편 보시라이의 이름 끝 글자 라이(來)에 맞추어 자신의 이름도 원래 이름 끝 글자 라이(萊)의 초두(艹)를 빼버렸다. 구카이라이는 대학 졸업 후 변호사로 명성을 날렸다. 둘 사이에 미국에 유학 중인 아들 보과과(薄瓜瓜)가 태어났다. 보시라이는 현재의 국가 주석 시진핑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출세 가도를 달렸다. 급기야는 충칭시 서기 시절 공산당 권력의 핵인 상무위원 후보 물망에 거론될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인 것을 어쩌랴! 좋은 시절, 잘 나가던 시절은 여기까지다.

보시라이는 재판에서 ‘만감이 교차한다. 나에게는 이제 여생(餘生)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처연하게 말했다. 자신의 유죄를 주장한 아내 구카이라이에 대해서는 ‘아내는 미쳤다. 거짓말을 한다. 웃긴다. 가소롭다’며 분격했다. 구카이라이는 법정 진술에서 어느 기업인으로부터 프랑스 별장 매입과 아들 보과과의 항공료 조로 거액을 받았으며 이를 보시라이가 알고 있다고 증언했다. 뿐만 아니라 구카이라이는 보시라이가 완강하게 부인하는 뇌물 수수 혐의를 검찰의 주장대로 선선히 시인하는 증언을 해주었다. 이런 증언을 해주는 대가로 정상참작이나 감형(減刑)의 제안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이쯤 되면 부부 관계 차원에서만 본다면 둘은 부부가 아니라 원수일 것이다. 성경에 ‘다투는 부부가 큰 집에 사느니 차라리 광야에서 홀로 움막집에 사는 게 낫다’는 구절이 있듯이 애초에 왜 둘이 반려가 됐는지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을 것이 자명하다. 보시라이 부부의 몰락은 공사 생활에서 보인 피차의 도덕적 해이가 발단이다. 특히 구카이라이는 그가 영국인 사업가 헤이우두, 보시라이의 부하인 충칭시 공안국장 등과 복잡한 스캔들을 일으켰다. 구카이라이는 어떤 이유로 헤이우드를 살해했으며 이를 보시라이의 부하가 폭로함으로써 보시라이 부부는 권력과 명예와 돈을 모조리 잃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드디어 인생의 미로, 사랑의 미로에서 막장에 닿았다. 인간적으로는 연민의 마음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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