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60주년 기념 및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 비전(6)
또 독일 통일 이후 1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문제들이 남아 있다. 독일과 같은 후유증을 겪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함께 고민해봐야 할 과제들도 알아보자.
연합국 반대에도 동·서독 통일 염원 막지 못해
[천지일보=이솜 기자] “지금보다 통일비용이 세 배가 더 소요될지라도 우리는 통일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역대 독일 총리들 가운데 단연 ‘최고의 총리’로 꼽히고 있는 헬무트 슈미트가 독일 통일 1년 후 한 연설에서의 발언이다. 통일 후 가장 어려웠던 당시 독일 내 상황 속에서 이 같은 그의 발언은 대다수 독일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독일 통일의 가장 큰 요인으로는 당시 동독과 서독 주민의 통일에 대한 강한 열망, 즉 ‘아래로부터의 통일’이 꼽힌다. 이에 따르는 특징으로는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적 통일, 동·서독 사이 사회·문화 등의 끊임없는 교류 등이 있다.
◆뜻있는 곳에 준비된 ‘통일’
역사적인 ‘걸작품’이라고 평가받는 독일 통일의 가장 큰 추진력은 동·서독 국민의 ‘통일에 대한 열망’이다. 국민의 통일에 대한 의지와 정부의 추진력이 융합돼 통일을 이뤘던 것이다.
당시 독일 통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독의 콜 수상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3주 후 ‘독일과 유럽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할 때만 해도 통일이 5~10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측했다.
먼저는 연합국의 반대가 심했다. 당시 동독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소련(러시아) 다음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한 국가로, 소련은 동독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영국은 노골적으로 독일 통일에 불만을 드러내는 등 어느 국가도 이들의 통일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합국들의 반대에도 독일은 변화하는 국제사회의 분위기를 읽고, 그 틈새를 파고들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갔다. 또 아직도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통일을 주장하면서 의견이 분분할 때, 즉각적인 화폐통합과 조속한 통일을 내세우고 이를 적극적으로 밀고 나간 서독 콜 수상의 추진력도 한몫을 했다.
무엇보다 동·서독 사람들은 경제적·정신적 통일비용을 각자의 위치에서 지불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서독 사람들은 통일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동독 사람들은 정신적 고통을 참아야 했다. 로타 드메지어 전 동독총리가 “분단은 분담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고 발언했던 것은 당시 독일 국민의 생각을 반영해준다.
◆“통일은 매일 TV 앞에서 이뤄졌다”
역사적으로 동·서독은 동일한 언어와 기독교 문화를 공유해왔다. 또 동서독이 분단 직후부터 통일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진행한 인적·물적 교류는 동독인들이 큰 두려움 없이 서독으로의 편입을 결정할 수 있었던 요인이다.
동서독은 기본조약을 통해 서로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고 주변 상황이 어렵거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상들이 만나 진지하게 대화하며 모든 분야에 걸쳐 교류와 협력을 증진시켜 왔다.
1973년 이후 자유로운 서독 TV 방송 시청은 동독인들의 체제 비판과 거부에 영향을 줬으며 이는 강력한 통일의 의지로 나타났다. 한 조사에 따르면 분단 시기 동독 주민의 80%가 서독 TV 방송을 시청할 정도였다. 한 언론인은 통일 후 이를 두고 “통일은 매일 TV 앞에서 일어났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엇갈리는 평가… 경제 부분 ‘부정적’
한편 큰 틀에서 보면 독일 통일은 위대한 작품이지만, 세부적으로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는 평가다. 가장 큰 과오는 경제적 비용에 대한 실수로 많은 실업자를 발생시킨 것이다. 동독기업들의 갑작스러운 파산은 통일비용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다.
이 밖에도 ▲민영화 정책 실패 ▲동독의 자본주의 교육 미비 ▲국가의 과도한 재정지원 등이 통일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독일의 과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