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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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쯤 되는 남학생들이 시내버스 뒷좌석에서 ‘턱스크’를 한 채 흡연하는 사진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논란이 되고 있다. 필자도 ‘이게 실화냐?’라고 생각하며 눈을 의심했지만, 현재 대한민국 중학생들의 실상임이 틀림없다. 70년대 대중교통 뒷좌석 창문을 열고 흡연하던 어른들의 모습을 2022년에, 그것도 중학생을 통해 다시 보게 된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몰지각한 어른이 해도 손가락질받을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중학생이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고 흡연하는 행동은 우리 사회의 촉법소년에 해당하는 청소년 문제를 종합적으로 대변한다.

대중교통인 버스 내 흡연은 국민건강증진법의 대중교통 금연 규정에 따라 1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하지만 미성년자인 촉법소년의 경우 이 과태료 규정마저 적용할 수 없다니 시대의 변화를 법이 못 따라가도 너무 못 따라간다는 느낌이다. 청소년에게 담배를 판 가게를 역추적해 처벌하는 규정이 있지만, 노인이나 어른에게 담배 셔틀을 시키면 이마저도 처벌이 불가하다. 청소년이 흡연하면 부모에게 흡연 과태료를 내게 하는 규정을 만드는 게 효과적이란 생각이 든다.

사회나 학교의 제재를 떠나 얼마나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지 못했으면, 버스에서 흡연할 정도의 인성으로 막 자랐는지 마음이 아프다. 경찰에게조차 욕하고 대들고, 학교에서는 교사를 서비스 종사자쯤으로 알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요즘 청소년들이 가정교육마저 무너졌을 때 나타나는 행동이다. 길거리에서 청소년의 이런 행동을 보고도 어른들이 아무런 훈육도 못 하는 세상이 된 게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버스에서 흡연하는 중학생들은 부모마저 포기한 아이들이라 어떤 어른이 훈계해도 듣지 않을 게 뻔하다.

옛날에도 청소년 흡연은 존재했다. 하지만 대부분 어른의 훈계가 무서워 골목에서 피거나, 흡연하다가도 어른이 지적하면 바로 담배를 끄기라도 했다. 필자도 예전에는 길거리 흡연하는 학생을 수없이 훈계하고 지나갔지만, 요즘은 못 본체 지나친다. 학교 내에서 교사의 훈계가 먹히지 않는 시대에 밖에서 어른의 훈계를 들을 아이라면 애초에 길거리에서 흡연하지 않는다. 훈계한 어른이 “아저씨! 그냥 못 본체 지나가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할 정도니 더는 훈계해서는 안 되고 훈계한다고 듣지도 않는다. 흡연하는 학생을 훈계하다 집단린치를 당해 뇌사상태에 빠졌다 사망한 체육 교사 사건도 있다.

필자가 학생부 근무하던 2000년대 이전에는 흡연으로 몇 회 이상 적발되면 정학 처분도 내렸다. 지금은 교내에서 흡연해도 금연학교 특별교육을 보내는 게 가장 강한 처벌이다. 금연학교를 보내면 수료 기념으로 다시 담배를 피우고 학교로 돌아오니 금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반성도 하지 않는다. 마치 전과를 달고 오는 개선장군 흉내를 내니 역효과다.

또 다른 사건으로 학교 경비원이 밤늦게 몰래 학교 담을 넘어 들어온 초등학생들을 잡아 무릎을 꿇리고 꿀밤을 때렸다고 부모가 아동학대로 고발했다는 뉴스도 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문이 잠겨 출입금지가 된 학교에 들어간 자녀들의 행동을 나무라고 학교 측에 사과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규정과 법을 준수하는 법을 배운다. 오로지 자식이 추운 날씨에 무릎을 꿇고 꿀밤을 맞은 걸 문제 삼는 건 올바른 가정교육을 할 기회를 발로 걷어찬 무지한 행동이다.

‘나는 왕따 가해자입니다’라는 푯말을 들고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아이 옆에 부모가 의자를 두고 앉아 그 소년을 지켜보는 미국 뉴스는 한국의 두 가지 사례와 대비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부모는 아이가 친구들을 왕따하고 괴롭혔다는 사실을 알고, 팻말을 들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벌을 줬다. 자녀가 귀할수록 잘못된 행동에는 더욱 엄하게 가르쳐야 두 번 다시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걸 미국 부모는 알고, 한국 부모는 모르고 있다. 아무리 혼을 내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녀 스스로 깨닫고 변화하려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예전에는 아무리 막 나가는 아이라도 어른과 교사에 대한 기본 예의는 지켰다. 요즘은 제일 무서운 게 중고등학생이다. 학생 인권은 강조하면서 제대로 된 교칙이나 법을 만들지 않아 생긴 부작용이다. 교칙이나 법으로도 아무런 거리낄 게 없는 아이들이 길거리의 하이에나가 돼 돌아다닌다. 교사보다 학교의 일진이 더 막강한 파워를 갖는 세상이니 오히려 선량한 아이들이 학교를 떠난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양보다 아흔아홉 마리의 선량한 양을 보호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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