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 강성면 신화리 사지
양평군 강성면 신화리 사지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금동불상의 면모

이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불상은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불상과는 모양에서 차이가 난다. 백제, 신라 지역에서 출토된 불상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불상의 국적은 어디일까.

우선 이 불상의 높이는 30㎝나 된다. 대개 금동불은 20㎝ 내외의 크기가 보통인데 유달리 크다. 연화대좌는 없으며 당초에 대좌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대좌 없이도 그대로 잘 서기 때문이다. 주조방식은 삼국시대 이루어졌던 통주(通鑄)다.

높지 않은 머리는 나발(螺髮)로 보이는데 마모가 심하다. 평평한 육계가 있으며 이마는 좁은 편이다. 비교적 이마가 넓게 표현된 신라, 백제 불상과는 다르다. 전면 머리에 도금흔적이 남아있다. 눈은 반개(半開)했으며 오른쪽 눈썹 부위의 마모가 심하다. 얼굴은 긴 편으로 턱은 살이 찌어 넓은데 위엄을 갖추고 있어 경직된 인상을 준다. 양 귀는 양 볼에 붙여 길게 표현되었으나 어깨까지는 내려오지 않았다.

법의는 통견(通肩)이며 어깨에서 크게 ‘U자’형으로 내려와 가슴 부분으로부터 복부까지 노출시키고 있다. 가슴 부분에는 내의(僧却崎)를 암시하는 3개의 음각 사선이 왼쪽 가슴 부근에서 오른쪽 옆구리 쪽으로 지나고 있다.

법의는 양손의 팔목에 걸쳐져서 다시 아래로 여러 겹의 ‘U자’형 옷 주름을 그리며 무릎까지 흘러내리고 있다. 아래로는 내의자락이 보이고 있는데, 수직으로 내려오는 옷 주름이 양쪽 무릎 아래에서 ‘Ω’형을 그리며 접혀있다.

그리고 다시 그 아래로는 군의(裙衣)자락이 보이는데 매우 단순하게 표현되었다. 손 모양은 양손이 마모되어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통식인 여원시무외인을 결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는 이 불상을 북제~수나라 영향을 받은 고구려계로 보고 있다. 이 불상을 신라계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삼국시대 신라에서 유행되었던 상호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의 불상은 6세기 전반은 북위 양식, 6세기 후반은 북제·북주 양식, 7세기 초반은 수(隋) 양식으로 크게 구분된다. 북위 양식은 가늘고 길어 연약해 보이기까지 한 신체를 두꺼운 법의가 감싸고 있으며, 옷자락이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좌우로 뻗치고 천의가 ‘X자’로 교차하는 것을 큰 특징으로 한다.

북제·북주 양식은 신체가 4~5등신이며 법의가 얇아지고, 보살의 경우 장식이 화려해지고 굵고 큰 영락을 착용하고 있다. 수(隋) 양식은 북제·북주 양식과 거의 흡사하나 신체가 약간 더 길어지는 등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되어 필자가 최근에 학계에 보고한 34㎝ 크기의 신라금동여래입상을 비교해 본다. 이 불상도 양평출토 불상처럼 통주(通鑄)이며 대좌가 없이도 잘 선다. 지금까지 발견된 삼국시대 금동불상 가운데 미소가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불상은 의문이나 상호 대퇴부의 의문 양식이 남조 제작의 불상을 닮고 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육계(肉髻)가 큼직하다. 얼굴은 신체에 비교하여 큰 편이며 상호는 청년상으로 작은 입가에 미소가 아름답다. 눈썹은 선각으로 표현했으며 비량(鼻梁)은 정제 되어 있다. 눈썹을 선각으로 표현한 것은 신라 통일기 불상에서 자주 보이는데 이 불상으로 편년을 올려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눈은 반개(半開)했으며 눈두덩이 두툼하여 자비가 넘친다. 눈두덩이 두툼한 것은 고대 불상의 특징으로 자비를 표현하는 수법이다. 양이(兩耳)는 길며 어깨에는 닿지는 않는다. 법의는 통견(通肩)이며 의문은 양팔에 걸쳐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의문은 복부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층단을 이루고 있는데 양쪽 발 대퇴부에서 각기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 법의는 아래에서 ‘U자’를 이룬다. 이런 양식은 후대 통일신라 불상에 계승되고 있다.

수인은 여원시무외인(與願施無畏印)을 결하여 삼국시대 불상의 통인(通印)을 따르고 있다. 뒷면은 무늬가 약화됐으나 의문은 길게 표현하여 왼팔 부분에서 약간씩 말린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광배 꽂이와 대좌는 없으나 국보 제186호 양평금동불상처럼 그대로 세워도 잘 선다. 이 불상의 전면 복부 일부와 측면에는 도금한 흔적이 소량 남아 있어 당초 금동불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拙稿. 삼국시대금동여래입상의 신례. 2020. 6. 30. 충북문화재연구원 주최 학술세미나 주제발표).

한편 한국 고미술연구 최고 권위자이신 강우방 박사도 학술발표에서 특별강연을 통해 “삼국시대 신라 금동여래입상은 상호가 매우 좋으며 머리의 큰 육계는 삼국시대 특징을 지닌다”고 밝혔다. 강 박사는 양평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86호)과 같이 통불(通佛)이며 좌대가 없어도 곧게 설 수 있도록 주조되었다고 밝혔다.

또 강 박사는 “금동불의 의문은 통견으로 가슴에서 밑으로 ‘U자’를 이루다 양발 대퇴부에서 동심원을 조각했다”면서 “이는 다른 삼국시대 불상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양식”이라고 말했다. 특히 뒷면의 의문에 대해 왼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법의 긴 자락은 접하며 내려오는 옷 주름을 꽤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도 주목된다는 것이다. 강 박사는 이 같은 양식도 신라 불상의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새로 찾아진 신라금동불은 양평 출토 금동여래상과 비교되는 작품이다. 서로 비슷한 방식으로 주조되었으나 고구려와 신라계로 구분되고 있다. 6~7세기 초 중국 남북조시기에서 영향을 준 불상이 어떤 양식으로 어떻게 주조되었는가를 입증하는 유물이라고 하겠다.

좌)신라 삼국시대 금동불입상 우)양평군 강상면 신화리 출토 금동불입상
좌)신라 삼국시대 금동불입상 우)양평군 강상면 신화리 출토 금동불입상

미륵하생 신앙의 산물

필자는 양평리 출토 금동불에 미륵여래상(彌勒如來像)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싶다. 미륵신은 4~6세기 중국 대륙에서 먼저 유행했다. 한나라 붕괴 이후 여러 나라로 갈라져 전쟁을 하던 남북조시기에 전성을 이룬 것이다.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한 것은 전쟁과 삶의 위기가 상존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도 삼국이 국경분쟁이 잦아지고 대립하는 일이 빈번해졌다(1992, <신라시대 미륵신앙의 연구(新羅時代 彌勒信仰의 硏究)>, 김혜원,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또 신라 진흥왕도 고구려 백제와 치열한 국경 전쟁에서 승리하고 북, 서진을 하면서 국민을 하나로 응집하는 절대적 신앙이 필요했다. 미륵신앙의 요체인 상생신앙(上生信仰)과 하생신앙(下生信仰)은 신라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는다. 박광연의 연구에 하면 신라미륵신앙은 진흥왕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륭성왕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던 진흥왕이 미륵불의 출현을 기대하였다는 것이다. 진흥왕대 완공한 흥륜사의 당주가 미륵이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이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박광연, 2011, ‘7~8세기 신라미륵조상의 역사적 의미’, <이화사학연구> 제50집. p.188).

미륵신앙에서 출현하는 부처는 미륵보살(彌勒菩薩)과 미륵여래(彌勒如來)로 나타난다. 삼국시대 불상들은 대부분 미륵신앙에서 태어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미륵여래는 입상(立像), 좌상(坐像), 의좌상(倚坐像)으로 나타나며, 보살상은 반가상(半跏像)으로 만들어졌다. 미륵여래불상의 수인(手印)은 석가여래와 같이 시무외(施無畏), 여원인(與願印)을 결한 통인이다. 이는 중국 대만의 학자들도 논문을 통해 밝히고 있다.

‘수시무외인(右手施無畏印), 좌수작여원인(左手作與願印), 북제일미륵비상(北齊一彌勒碑像) 중단적미륵불(中段的彌勒佛) 여차작품적도상완전일치(與此作品的圖像完全一致), 남북조시적미륵상상상일수시무외(南北朝時的彌勒像常常一手施無畏), 일수작여원인(一手作與願印), 저량종인계적결합(這兩種印契的結合), 가능상징래영지의(可能象徵來迎之意), 표시미륵불환영수행자어미륵인간정토중생(表示彌勒佛歡迎修行者於彌勒人間淨土重生) 령일위건봉원년(另一為乾封元年)(666) 적미륵상(的彌勒像), 기우수치슬상(其右手置膝上), 좌수거기(左手舉起), 수장향내(手掌向內), 저종미륵도상(這種彌勒圖像), 타처불견(他處不見), 래원위하(來源為何) 칙잉대사운운(則仍待查云云)’

- <수당지미륵신앙여도상(隋唐之彌勒信仰與圖像)>, 국립고궁박물원서화처(國立故宮博物院書畫處) 리옥민(李玉珉), 1987, 예술가출판사 대북시(藝術家出版社 臺北市)

이 시기 신라에서 만들어진 미륵여래상의 경우 민머리인 소발(素髮)이 주류를 이루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니고 있다. 이유는 북제나 북주 혹은 고구려를 통해 북위식 불상들이 전해져 이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다.

이때는 거찰 황룡사의 창건과 더불어 몸체가 장대한 장육불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금동제 불상에서도 유달리 크고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불상이 제작되었다. 국보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약 6세기 후반 7세기 초에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2012년 중국 허베이성 업성시에서 무려 3000여 점의 불상 등 유물이 한 구덩이 안에서 찾아졌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반도의 미륵신앙과 관련한 매우 주목되는 불상이 있었다. 용화수로 만든 감실 안에 북제(北齊) 시기의 반가사유상이 있었던 것이다.

양평 금동불상은 북제~수나라 시기 유행했던 불상의 면모를 많이 닮고 있다. 장신의 키와 통견의 법의, 아래로 길게 내려온 ‘U자’형의 의문, 발 아래 내려온 군의 ‘Q자’형의 모양이 비슷하다. 새로 찾아진 신라금동불입상이 미소를 가득 담은 청년상이라면, 양평 금동불상에서는 강인한 고구려 전사 기상이 엿보이고 있다.

북제시기 석제불상
북제시기 석제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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