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락사지
장락사지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장락’이란 특별한 이름

장락(長樂)이란 단어는 고대부터 중국 민족이 즐겨 사용했던 길상(吉祥)용어다. 중국의 <금석색(金石索)>에 따르면 ‘장구환락 영불결속(長久歡樂, 永不结束. 기쁨과 즐거움이 영구하여 끝이 없다)’의 줄인 말로 한나라 황제는 이 문구를 사랑하여 장락궁(長樂宮)까지 지었다고 한다.

<예기(禮記·樂記)>의 ‘樂’조를 보면 ‘낙은 천지의 화합으로 본래 화(和)에서 나왔으며 천자와 제후의 화에서 비롯된다’고 주석을 달고 있다(樂者, 天地之和也 <禮記·樂記>, ‘樂’的本質是‘和’, 天代表天子, 地代表諸候). 한나라 황실의 삼궁은 장락궁(長樂宮), 미앙궁(未央宫), 건장궁(建章宫)을 가리키며 이 중 장락궁이 주 궁전이었던 것이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되는 한나라 문자와당 가운데는 ‘장락(長樂)’ 혹은 ‘장락미앙(長樂未央)’이라고 각자된 유물이 많다.

그런데 황실에서만 사용하던 ‘장락’이라는 이름이 왜 이 절터에 붙여졌던 것인가. 고구려 왕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중국 어떤 나라의 황실과 관련이 있었던 것일까.

필자는 중국 고대 <사서(史書)>에서 장락이란 연호를 사용한 제왕들을 검색해 봤다. 장락을 쓴 것은 이미 기원전 한대(漢代)부터 여러 명이 등장하고 있으나 고구려 중엽 시기에 살았던 제왕은 중국 5호 16국시대에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후연(後燕)의 제3대 황제 소무제(昭武帝) 모용성(慕容盛, 재위 398~401)이었다.

소무제 모용성은 스스로를 ‘서민천왕(庶民天王)’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그 해를 원년으로 연호를 ‘건평(建平)’에서 ‘장락(長樂)’으로 바꾸었다. 장락 연간인 400(장락 2)년 후연은 고구려를 공격해 신성(新城)과 남소(南蘇) 등 2개 성을 점령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혔다.

그 후 5세기 중반 등장한 북연(北燕)의 황제들도 ‘장락’이란 연호를 썼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고구려 장수왕시기 지금의 하북성에서 집권한 풍홍(馮弘)이었다. 그는 장락신도(長樂信都, 지금의 하북성 기주冀州) 출신으로 북연의 마지막 황제로 기록된다. 제천처럼 ‘장락신도’란 지명까지 기록에 남아 있다.

당시 풍홍은 북위(北魏)와 대립하고 있었으며 고구려 장수왕은 등거리 외교를 통해 처음에는 인정해 주었다. 땅을 빌려줘 살게 했으나 북위 눈치를 살피느라 결국 그를 살해하고 만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23년부터 27년까지 기사 가운데 북위와 북연의 풍홍과 연관된 사실을 검색해 본다. 풍홍의 비극적 운명이 우리 역사에도 소상히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二十三年, 夏六月, 王遣使入魏朝貢, 且請国諱. 世祖嘉其誠款, 使錄帝諱系及以與之. 遣員外散騎侍郞李敖,拜王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擄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秋, 王遣使入魏谢恩. 魏人数伐燕,燕日危蹙. 燕王馮弘曰 ‘若事急, 且東依高句麗, 以圖后擧. 密遣尚書陽伊, 請迎于我.

二十四年, 燕王遣使入貢于魏, 請送侍子.魏主不許, 將擧兵討之, 遣使來告諭.夏四月, 魏攻燕白狼城, 克之.王遣将葛廬, 孟光, 將衆数萬, 随陽伊至和龍, 迎燕王.葛廬、孟光入城, 命軍脱弊褐.取燕武庫精仗以给之, 大掠城中. 五月, 燕王率龍城遣户東徙, 焚宫殿, 火一旬不滅.令婦人被甲居中, 陽伊等勒精兵居外, 葛廬、孟光帥骑殿後, 方軌而進, 前后八十馀里. 魏主聞之, 遣散骑常侍封撥来, 令送燕王.王遣使入魏奉表, 称當興與馮弘俱奉化.魏主以王違詔, 議擊之, 將發隴右骑卒, 劉絜, 東平王丕等諫之, 乃止.

二十五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贡. 二十六年, 春三月, 初, 燕王弘至遼東. 王遣使劳之曰 ‘龍城王馮君,爰適野次, 士馬劳乎!’. 弘慙怒, 稱制讓之. 王處之平郭, 尋徙北豊. 弘素侮我,政刑赏罰猶如其国. 王乃奪其侍人, 取其太子王仁爲質. 弘怨之, 遣使如宋, 上表求迎. 宋太祖遣使者王白驹等迎之, 幷令我资送. 王不欲使弘南来, 遣将孙漱, 高仇等,殺弘于北豊, 竝其子孫十馀人. 白駒等帥所领七千馀人, 掩討漱, 仇. 殺仇. 生擒漱. 王以白駒等專殺, 遣使執送之. 太祖以遠國不欲違其意, 下白驅等獄,已而原之.

二十七年, 冬十一月, 遣使入魏朝貢十二月, 遣使入魏朝贡.

장락미앙 와당
장락미앙 와당

북연의 유민들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의 요녕성 신풍현에 자리 잡았던 북연(北燕)의 인가(人家)는 약 3만호(약 10만 명 추산)가 있었다는 <위서(魏書)> 기록이 있다. 이때 황제 풍홍을 잃은 북연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지리멸렬하여 유주(幽州)나 북위, 혹은 동으로 고구려 땅으로 옮겨 왔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 기록 <위서(魏書)>를 보면 요동, 성주, 낙랑, 대방, 현도 등도 모두 북위에 투항했다고 기록된다.

대흥이년(大興二年, 432년) 팔월(八月), 북위태무제척발증친자솔병정토북연(北魏太武帝拓渤蒸親自率兵征討北燕), 풍홍고성자수(馮弘固城自守). 구월(九月), 북연소할영구(北燕所轄營丘), 료동(遼東), 성주(成周), 낙랑(樂浪), 대방(带方), 현토등륙군전도향북위투강(玄菟等六郡全都向北魏投降), 태무제파북연적삼만다호인가천사도유주(太武帝把北燕的三萬多户人家遷徙到幽州). 상서곽연동풍홍향북위투멸귀부(尚書郭渊東馮弘向北魏投滅歸附), 병진헌녀인입조(竝進獻女儿入朝), 청구주북위적부용(请求做北魏的附庸), 이보전자기적왕위(以保全自己的王位). 풍홍설도(馮弘說道): 량국지간조취산생렬흔(两國之間早就産生裂痕), 결하적수원이경흔심료(结下的讐怨已經很深了), 강부북위시자취멸망(降附北魏是自取滅亡), 환불여고수성지(還不如固守城池), 등대전기운운(等待轉機云云)… <위서·권(魏書·卷) 구십칠(九十七) 렬전제팔십오(列傳第八十五)>

<삼국사기>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유민의 상당수가 장수왕의 한반도 남진정책에 의해 변방 신라의 경계지역으로 이주됐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공격할 때는 말갈이나 피지배민족을 앞세워 싸웠다. 고구려 유적에서 말갈의 명문 와편이 찾아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경기도 포천 반월성에서 발견된 ‘마홀(馬忽)’명이 대표적이다.

전쟁이 발발하면 신라는 병합한 금관가야를, 백제는 가라를 앞장세웠다. 장수왕이 신라 방어에 주력한 변방은 바로 최남단으로 추정되는 소백산 죽령지역인 제천, 단양지역이다. <여지승람>에 영주, 봉화까지 고구려 영토로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보면 더 남하했을 가능성도 있다.

전쟁에서 패한 피지배민족은 정복자들에 의해 강제이주 되는 것이 관례였다. 풍홍이 죽은 후 제천 ‘장락’ 지역에 북연 유민들이 이주해온 곳은 아닐까. 중국의 일부학자들은 북연을 고구려계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한족이 아닌 선비족으로 말갈처럼 고구려 별종으로 보는 것이다.

장락사 표지석
장락사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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