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스포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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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7년 12월 대선이 끝난 며칠 뒤, 근무하던 일간스포츠 편집국으로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 일행이 인사차 방문했다. 체육부 자리로 들른 노 대통령 당선자는 부장을 비롯해 부원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저, 노태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정중하게 인사를 나눴다. ‘보통 사람, 노태우’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선을 치렀던 이답게 전혀 권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와 기자들과 대면을 했던 것이다. 대통령 당선자가 스포츠 신문 편집국을 방문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를 직접 만나기 이전만 해도 육사 출신의 장군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2인자라는 꼬리표가 달리며 권위적인 모습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실제 보니 그는 옆집 아저씨같이 편안한 인상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했다. 위에서 군림하는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의 이미지를 내세운 것도 이해할만하다고 봤다. 현역 대통령은 물론이고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스포츠 신문 편집국을 직접 들른 이는 그를 빼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26일 세상을 떠난 노태우 전 대통령은 한국 체육계를 위해 굵직한 족적을 남긴 대표적인 인물이다. 1980년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당시 세계적인 강국으로 발돋움하던 한국 스포츠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민정당 총재 등 정치활동을 하면서 초대 체육부 장관, 대한체육회장,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등 체육 요직을 두루 걸치며 한국체육의 안팎을 다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가 체육계에 몸을 담은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려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뒷받침 됐기 때문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19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한 그는 친구 사이였던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내각에 입각, 초대 체육부 장관을 한 달 남짓 맡았다. 그는 1983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 겸 1986 서울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맡아 체육계로 컴백했다. 1984년에는 28대 대한체육회장 겸 18대 대한올림픽위원장으로 선임돼 2년 간격의 서울아시안게임·서울올림픽 준비를 지휘했다. 집권 민정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돼 1987년 대선에서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된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9월 17일 역사적인 서울올림픽의 개회 선언을 함으로써 한국사와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냉전의 주축인 미국과 구소련의 힘겨루기로 인류 화합의 대제전인 하계올림픽은 1980년 구소련 모스크바와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반쪽으로 치러졌다가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다시 하나로 모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당시 지구촌 159개 나라가 거의 모두 참가해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의 원형을 되찾았다. 서울올림픽은 2차 세계대전 후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로 40년 이상 양분된 냉전 체제를 무너뜨리고 데탕트 시대의 서막을 연 대회로 역사에 남았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1990년대 후반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군형법상 내란 혐의와 비자금 조성 등으로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7년, 추징금 2629억원 등의 형이 확정돼 처벌을 받아 정치적으로 국민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의 특별 사면조치로 석방된 그는 한국 체육계를 위해서 누구보다도 당대에 한국 역사에 빛나는 큰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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