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아트센터 나비 직원들이 28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천지일보 2021.10.28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아트센터 나비 직원들이 28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천지일보 2021.10.28

전두환 2인자, 함께 내란 주도

대통령 취임 후에는 5공 청산

임종 전 5.18 유족에 사과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2인자로, 12.12 군사 쿠데타와 5.17 내란을 함께 주도했다는 큰 오명을 남겼다. 다만 여당인 민정당 대표시절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전격 도입한 것과 ‘5공 청문회’를 개최하는 등 민주화 진전에 역할을 했다는 긍정 평가도 받는 등 한국근현대사에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남겼다. 정치인으로서도 외교‧대북정책에 능통해 긍정적 평가를 얻고 있다. 그러나 퇴임 후에는 수천억원의 비자금 은닉 사실이 드러나 말로가 좋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의 삶은 ‘군부 독재’와 ‘민주화’라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군부 쿠데타 주동 세력이라는 오명과 직접선거로 당선된 첫 대통령이라는 영광이 그에게 붙는 수식어였다. 특히 그는 임종 전 유언과 장남 노재헌씨를 통해 40년 만에 5.18민주화운동 학살에 대해 유족들에게 사죄의 뜻을 전했다.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거부하고 있는 전 전 대통령과는 다른 행보로, 과오를 일부 씻어냈다는 평가도 얻는다.

노 전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전 전 대통령과는 육사 동기로 제4공화국 당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해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와 이듬해 5.17 내란을 주도했다. 그는 군사반란 당시 자신이 지휘하던 제9보병사단에서 2개 보병연대를 동원해 반란을 지원했다. 쿠데타에 저항하다 쫓겨난 장태완의 후임으로 수도경비사령관(현 수도방위사령부)에 올랐다.

전두환 정권의 2인자에 오르며 승승장구한 그는 여당인 민정당 대표를 거쳐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대통령 선거 당시 내세운 슬로건이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였는데, 이는 신군부 출신으로, 군사정권 수혜자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한 선거 전략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그 이미지를 떨치기 위해 5공 청문회를 개최해 5공 청산을 했다. 당시 숙청 명분으로 전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내 둘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에는 비교적 능통했다. 그는 취임 후 북방 외교 정책을 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1989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공산권 국가들과 외교를 시작한 것. 1990년 소련에 이어 1992년에는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 총서기와 양상쿤 국가주석 등을 만나 수교를 맺었다.

대북정책에서도 일부 성과를 거뒀다. 1988년 7.7선언으로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1989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발표했으며, 1990년에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UN)에 가입했다. 또 임기 중에는 남북고위급회담을 진행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으로 이어졌다.

퇴임 후에는 14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은닉 사실이 밝혀져 말로는 씁쓸했다. 검찰 수사 결과 비자금 실체가 드러났고, 그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재임 기간 중 5000억원을 기업으로부터 받았고 1700억원이 남았다”고 실토했다.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신군부 핵심 인사 18명과 함께 구속돼 재판을 받았다. 전 전 대통령이 무기징역을 받았고 그는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 1997년 12월 퇴임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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