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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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 산책길에 나서면서 하늘을 자주 올려다본다. 떠다니던 구름이 갑자기 비를 뿌려대 낭패를 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더위가 다 가시지 않아서 때로는 비를 맞기도 하지만 희멀건 하늘에서 연신 잔 비를 뿌려대니 얼마나 올 건지 강수량을 예측할 수가 없다. 그러한 사이 주변에서 시원하게 울던 매미 울음소리가 차차 엷어져 가고 있으니 가을이 가까이 있다는 것인데, 천고마비의 계절이 오기도 전에 가을을 예고하는 장맛비가 먼저 찾아든다.

뜻하지 않게 산책길에서 비를 만나면 구름 모양을 살피게 되는데, 구름의 짙고 옅은 색깔을 보면 비가 곧 끝나겠다 정도는 대충 알 수 있어 걸어가면서도 수시로 구름을 보는 것이다. 무상무념의 상태에서 구름을 대하면 모양도 각양각색이지만 바람에 의하여 금방 모습이 변해지는 것도 하나의 재밋거리라면 재미다. 구름을 생각하고 이것저것 떠올려보다가 언뜻 고려 말 때 이존오(李存吾) 선생이 쓴 글 한편을 기억해냈다. 청구영언에도 나와 있는 글이다.

시조 원문과 현대적 해설이 비슷한데, “구름이 무심(無心)탄 말이 아무래도 허랑(虛浪)하다/ 중천에 떠 있어 멋대로 다니면서/구태여 광명한 날 빛을 덮어 무삼하리요”라는 내용인바, 우국충정의 글이다. 굳이 이 시조를 풀이한다면 초장에서는 당시 시대의 국정을 어지럽혔던 소인 간신배의 무리를 구름에 빗대고 있고, 중장에서는 그 사악한 무리들이 임금의 총애를 빌미로 온갖 횡포를 자행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으며, 종장에서는 그 간신배들을 비난하면서 어떻게 나라가 잘 돌아가겠느냐는 하는 우국충정이 가득 담긴 간접 화법의 시조인 것이다.

이존오(1341~1371) 선생은 충청도 공주목 석탄(石灘)에서 태어나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사관(史官)에 임명됐고, 우정언의 직책에 올랐다. 우정언(右正言)은 임금의 과실과 잘못된 정책 결정에 대해 간언해 정사를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 이 우정언이 그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당시 나랏일을 전횡하며 풍속을 어지럽힌 신돈과 그 무리들을 탄핵한 ‘논 신돈소(論 辛旽疏)’를 공민왕에게 올렸던바, 시쳇말로 한다면 아마도 번지수를 크게 잘못 찾은 것 같다. 신돈이 누구인가? 공민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괴승이 아니던가.

그랬으니 결과는 뻔한 일이었다. 예부터 내려오는 우리 속담에 ‘충언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 말 따나 공민왕은 우정언의 우국충정이 담긴 소에 귀 기울이지 않았으니 화는 도리어 이존오 선생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신돈 무리들이 의기양양해 임금에게 상소해 이 우정언을 사사(賜死)키로 했으나, 뒤에 이를 바꿔 심히 고문하고 전라도 장사(현 전북 고창) 감무로 좌천시켰다. 그 후 이존오 선생이 향리인 공주의 석탄(石灘)에 돌아와서도 나라를 걱정했던바, 그 때 쓴 글이 바로 ‘구름이 무심탄 말이…’로 시작되는 시조였던 것이다. 이 글 작용 여부를 떠나 훗날 공민왕이 잘못을 깨닫고 그를 성균관 대사성에 추증했지만 때늦은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국가사회에 충신보다는 간신이 많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자주 듣는다. 국가경영과 사경영에 있어서도 정의와 공정은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다. 국가사회에 정의가 무너지고 공정이 자리할 데가 없다는 그 국가사회는 죽은 사회와 마찬가지다. 이처럼 정의와 공정은 공사행정에서 인사에서 비롯된다고도 할 수 있는바, 사경영은 능력이 우선시되지만 공공부분의 고위직 자리는 아직도 정실인사, 보은인사, 봐주기 인사가 적지 않은 편이다. 꼭 찍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인사청문회 등에서 우리국민들은 그러한 사례를 많이 봐왔던 것이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우리사회에서 자취를 감춘 가운데, 특히 신의 직장이라고 하는 공기업에서 보은 인사, 끼리끼리 인사는 도를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전혀 능력이 없고 그 분야에 전공이 아님에도 ‘도와 줬으니까 한 자리 해라’는 식으로 숫제 노골인사다. 지난번 말썽이 됐던 청와대 청년비서관 인사도 청년들의 불만을 샀다. 어떠한 시험이나 공개적이고 공정한 절차 없이 고위직에 임명해버렸으니 이 소식을 접한 이 땅의 많은 청년들이 박탈감, 회의감에 빠졌고, 허무감마져 느꼈다는 것인바, 정부의 고위급 인사일수록 공정해야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각설(却說)하고, 석탄 이존오 선생은 위험이 다가올 줄 뻔히 알면서도 타락한 권력을 탄핵했다. 그것은 귀중한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을 다해 나라의 기강과 백성들의 편안에 관한 것이었으니, 정의와 공정함을 실현하기 위한 고뇌가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석탄 선생의 생애적 자취가 높이 받들어져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러한 위업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코로나 정국의 어려운 시기에 권력자들이 국민들에게 희망을 선사해야 하겠지만, 대선주자들마저 국민들에게 눈꼴 사나운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현실에서, 이제는 구름이 사라진 푸른 하늘 아래 빛나는 햇살을 보고 싶은 게 민초들의 작은 소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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