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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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은 국치일이다. 대한제국은 탄생 13년도 안 돼 망했다. 1909년 초부터 일본은 한국의 병탄 논의를 구체화했다. 고종 퇴위 이후 2년간 병탄이 유예된 것은 항일 의병 투쟁 때문이 아니라 열강들의 승인이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1909년 3월에 일본 수뇌부는 한국 병합을 결정했다. 4월에 총리대신 가쓰라와 외무대신 고무라는 일본에 일시 귀국한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한국 병합에 합의했다. 6월에 각의는 이토를 경질하고 후임에 소네 아라스케를 임명했다.

7월 6일에 일본 각의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 병합을 단행한다’는 내용의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다. 이 건에 첨부된 ‘대한 시설 대강’에는 다수의 헌병과 경찰관을 파견할 것, 외교 사무를 완전히 장악할 것 등을 명시했다.

8월 14일에 한국 임시파견대 사령부는 남한대토벌실시계획을 세우고 9월부터 10월까지 의병 토벌 작전을 벌였다. 이는 사실상 호남 의병 학살 작전이었는데, 일본군 2300명과 군함 10척이 동원됐다. 이때 전사한 호남 의병이 420명, 체포나 자수한 자가 2천여명이었다. 일제는 체포된 의병을 해남-하동 간 도로공사에 강제 투입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이러자 송병준이 이끄는 일진회는 12월 4일에 합방 청원서를 내각에 제출했다. 이완용은 당황했다. 그는 12월 7일에 대신 회의를 열어 청원을 각하했다.

한편 1909년 10월 미국 태프트 행정부의 녹스 국무장관은 ‘만주 철도 중립화안’을 구상했다. 이는 국제 컨소시엄을 구성해 중국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해 동청철도(블라디보스토크–북만주)와 남만주철도(장춘-뤼순)를 매입하거나 금애 철도를 부설해 문호개방정책을 추진한다는 달러외교였다. 11월 6일에 녹스는 영국에 동참을 요구했다. 그런데 일본과 동맹인 영국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12월 14일에 녹스는 일본·러시아·프랑스·독일 등에 협조를 구했다. 일본과 러시아는 즉각 거부했다. 이럼에도 녹스가 철도중립화안을 계속 추진하자 일본과 러시아는 1910년 3월에 공동대응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4월에, 영국은 5월에 한국의 병합을 승인했고 7월 4일에 러일협약이 체결됐다.

그런데 일본은 미국에 한국 병합 사실을 사전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포츠머스 회담이 열리기 5일 전인 1905년 8월 4일에 이승만은 사가모어 힐 별장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이때 이승만이 “일본인들이 장차 미국의 후환이 될 터이니, 지금 대한제국을 도와 일본인들의 계획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서영희 지음,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p261~262) 일본은 1941년 12월 8일에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국제관계는 냉혹하다. 오직 국가 이익만 있다.

열강의 승인을 얻은 일본은 5월 30일에 소네를 해임하고, 후임에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다사케(육군대신 겸직)를 임명했다. 이어서 6월 3일에 일본 각의는 ‘병합 후 한국에 대한 통치 방침과 총독의 권한 등’을 확정했다.

여기에는 (1)조선에는 당분간 일본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大權)에 의해 통치할 것 (2)총독은 천황에게 직접 예속하고 조선에서 모든 정무를 총괄하는 권한을 가질 것 (3)조선의 정치는 최대한 간명하고 쉽게 해 나갈 것 등이 포함됐다.

7월 23일에 데라우치가 서울에 도착했다. 대한제국은 암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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