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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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4월 15일 제물포에 대한제국 최초의 군함이 입항했다. 군함은 입항 전부터 관심이었다. 2월 9일에 황성신문은 특종 기사를 실었다.

“소문을 들은즉, 정부가 일본인과 계약하고 군함 한 척을 구입한다는데, 그 가격은 50여만 원이라 하고 신품 여부와 톤수는 아직 모른다더라.”

3월 18일에 황성신문은 “황제 폐하가 군함을 양무(揚武)라고 명명했다. 배 이름은 카치다테마루(勝立丸), 총톤수 3435톤에 263마력짜리 엔진을 달고 있다”는 기사도 냈다.

4월 25일에 황성신문 기자가 양무호에 올라가 현장 취재를 했다.

“신제품이 아니오, 기십 년 전 일본의 고물인데 누차 파손돼 일본해상에 세워뒀던 배를 정부가 고가에 매입했더라. 해군이 사용하려면 본래 노후되고 파손된 물건이라 곤란하다더라.”

도대체 양무호는 어떤 배였나? 양무호는 영국이 1881년에 건조한 증기 화물선 팰러스호였는데 미쓰이 물산이 1894년에 25만엔에 구입해 9년간 써먹은 석탄 운반선이었다.

더구나 이 배는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어 골치를 앓았다. 미쓰이 물산 중역 회의록에는 “워낙 유지비가 많이 들어 화물선으로 쓰기에는 채산성이 많지 않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미쓰이 물산은 이 화물선에 일본 군함에서 떼어낸 구식 대포(80㎜) 4문과 소포(5㎜) 4문을 갑판에 장착해 대한제국에 군함으로 팔아먹은 것이다.

더구나 대한제국은 이런 고물 화물선을 미쓰이 물산이 구입한 25만엔 보다 두 배나 비싼 일화(日貨) 55만엔(한화 110만원, 오늘날로는 약 440억원)에 구입한 것이다. 이 돈은 1903년 국가 예산(한화 1076만원)의 10.2%, 군부(軍部) 예산의 26.7%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이러자 6월 1일자 황성신문은 “한 명의 수병도 없이 군함을 사들여 재정을 낭비했다”고 폭로했다. 실제로 그랬다. 양무호는 연료 소모량도 많고 기관 고장도 잦아 바다에 나가는 날보다 항구에 묶여 있는 날이 더 많았다.

한편 양무호 구입 사건은 주한 외국공관들의 비웃음을 샀다. 주한 러시아 외교관은 “고종이 일본의 국제 무기거래 사기극에 속았다”고 본국에 보고했고, 독일 신문에도 크게 보도돼 국제적 망신을 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1903년 1월 25일에 군부대신 신기선과 미쓰이물산을 대신한 임시대리공사 하기와라 모리이치는 군함 구입 계약을 하면서 ‘계약 부속 명세서’에 다음 내용을 명기했다.

“군기(軍器)는 적당히 완비할 것, 순양함 혹은 연습함의 목적에 변통(變通)함을 위함. 식당에는 미려(美麗)한 서양 요리 기구 30인분, 사령관 이하 함장 사관 25인 침구는 화려한 서양 물품으로 완비할 것, 각 구경대포 실탄 외에 예포(禮砲) 연습용 공탄과 소총 탄환도 적당히 준비할 것, 접객실을 특설해 대한국 황실 경절 때 봉축에 사용.”

정부는 ‘미려한 서양 요리 기구’와 ‘화려한 침구’가 조건이고, 군기는 ‘적당히’ 완비하고 예포용 공포탄 또한 적당히 두라 했으니 의전용으로도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고, ‘접객실을 특설해 황실 경절 때 봉축 사용’은 행사용이 아니었나 싶다.

주한미국공사 알렌은 이렇게 기록했다. ‘1903년 1월 군부대신 신기선이 약 55만엔 상당 전함(戰艦)을 일본으로부터 구입하는 발주 계약을 체결함. 이는 어극 40년 칭경식을 위해 발주한 것임.’(알렌, 근대한국 외교사 연표, 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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