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규혁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내는 것은 조국과 대회를 빛내는 일이지만, 메달을 따내지 않고도 아름다운 도전 정신만으로도 대회를 빛내는 동시에 메달 그 이상의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는 일도 있다.

지난해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4전 5기의 메달 도전이 실패로 끝나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선수가 있었다. 그는 바로 이규혁. 이규혁은 비록 5번의 동계올림픽에 꾸준히 출전했으나 메달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패배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밴쿠버에서 스피드스케이팅 최초의 금메달을 일궈낸 3인방 모태범과 이상화, 이승훈이 금메달을 따는 데 도움을 준 숨은 공로자였다.

이규혁은 20년 가까이 꿋꿋하게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자리를 지키며 후배들에게 기술이나 여러 가지 조언 등을 전해줬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한국 빙속의 간판으로 군림하면서도 유독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다.

13세인 1991년부터 태극마크를 달았던 이규혁은 1996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500m 주니어 세계신기록을 달성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1994년 릴레함메르에 참가한 이규혁은 500m 36위, 1000m 32위라는 성적으로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경험 쌓는 것에 만족하게 된다. 이규혁이 국제대회에서 일을 내게 되는 건 1997년 월드컵대회에서다. 1000m에서 한국 빙상 사상 첫 세계신기록을 낸 것.

올림픽을 1년 앞두고 나온 이규혁의 신기록으로 인해 빙속에도 올림픽 첫 금메달이 나올 것이란 희망을 갖게 했다. 큰 기대 속에 이듬해 이규혁은 나가노올림픽에 출전했으나 500m 8위, 1000m 13위라는 다소 실망스런 성적을 안고 귀국해야만 했다.

4년 뒤 솔트레이트올림픽을 맞이한 이규혁의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 메달을 기대해도 좋을 정도로 최고였다. 하지만 될 것 같으면서도 역시 안됐다. 500m 5위, 1000m 8위, 1500m 8위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감했다.

모두 다 상위권 기록으로 메달에 근접했으나 아쉽게 좌절됐다. 절치부심 끝에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 참가한 이규혁은 500m는 17위로 부진했지만 1000m는 0.05초 차이로 아쉽게 4위에 머물면서 또다시 메달을 놓쳤다. 오히려 후배 이강석이 500m에서 동메달을 따내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그 뒤 이규혁은 더욱 강해졌다. 2007년과 2008년, 2010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종합 우승을 연거푸 차지했다.

밴쿠버올림픽에 빙속 선수로는 환갑에 가까운 32세로 출전해 마지막 불꽃을 태운 이규혁이었지만, 메달은 또다시 그를 외면하고야 말았다. 500m에서 15위, 1000m에서 9위를 기록한 것. 결국 이규혁은 눈물의 기자회견을 통해 아쉬움을 나타냈고, 아울러 대신 메달을 따낸 후배들을 보면서 위안으로 삼게 된다.

그러나 이규혁은 올해도 2011 세계스프린트선수권 종합우승을 비롯해 동계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 동메달을 따내는 등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그의 도전은 언제까지 계속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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