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알베르빌동계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 1000m에서 우승한 뒤 시상대에 선 김윤만의 모습 (연합뉴스)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1948년 스위스 생모리츠동계올림픽부터 명함을 내민 이래 1988년까지 10번의 대회에 참가했으나 매번 노메달에 그쳤던 한국은 1992년 알베르빌올림픽에선 쇼트트랙이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메달의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이미 시범종목으로 참가했던 1988년 캘거리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김기훈과 1990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첫 개인종합 우승을 일궈냈던 이준호가 버티고 있었기에 쇼트트랙에 모든 관심과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

빙상협회 임원들은 물론 대부분의 기자들 모두가 쇼트트랙 경기장에 가 있었고, 스피드스케이팅은 찬밥 신세였다.

누구나 쇼트트랙에서 메달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 상황. 전혀 예상치 못한 첫 메달의 소식이 엉뚱한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들려온 것이다. 만 20세도 채 안 된 19살의 김윤만이 1000m에서 은메달 획득이라는 대형사고를 터트리고야 말았다.

사실 스피드스케이팅이 이같이 무관심으로 밀려날 정도는 아니었다. 당초 한국 빙속에는 80년대 중반부터 세계대회 여러 차례 입상한 배기태가 간판선수로 버티고 있었다.

배기태는 캘거리올림픽에서 첫 메달에 도전, 500m 5위와 1000m 9위로 아쉽게 메달을 놓쳤으나 한국 빙속의 메달 가능성을 알렸다. 하지만 배기태가 1990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뒤 은퇴해 한국 빙속은 전혀 기대주 없이 1992년 알베르빌올림픽을 치러야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메달 기대는커녕 경기 자체도 쇼트트랙에 밀려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 세계주니어대회에서 김윤만이 우승하긴 했으나, 단지 주니어 대회일 뿐 성인대회에 나가면 세계 벽을 실감할 것이라는 예상에 아무도 관심을 쏟지 않았다.

결국 겁 없는 주니어 우승자 출신 김윤만은 이 같은 무관심이 오히려 부담 없이 개인 기록이나 경신하겠다는 편한 마음으로 경기를 가질 수 있게 했고, 1분14초86이란 좋은 기록으로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과 어깨를 겨뤄 2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거뒀다.

1위와는 불과 0.01초 차이로 메달 색깔이 바뀐 점은 아쉬웠으나, 사상 첫 메달 달성만으로도 김윤만에겐 흥분 자체였다.

워낙 쇼트트랙 경기장에 집중이 다 돼 있었기에 당시 현장에서 한국 기자가 일본 방송국의 카메라를 급히 빌려 김윤만과 인터뷰를 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김윤만은 동계올림픽 역사상 한국의 첫 메달의 주인공이 됐음에도 불구 대부분의 스포트라이트는 쇼트트랙에서 2관왕을 차지한 김기훈에게 쏟아졌다.

이후 김윤만은 더 나은 성적인 금메달에 도전하기 위해 1994년 릴레함메르와 1998년 나가노올림픽에 3회 연속 출전했으나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다.

그래도 김윤만은 지난해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모태범이 금메달을 따기 전까지 빙속 종목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주인공이라 동계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늘 팬들로부터 회자되곤 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