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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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복제 시대를 맞아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말한 아우라(Aura)는 디지털 시대에 더욱 미술의 가치를 부각하는 개념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에 더욱 중요한 가치 부여의 잣대가 있다. 바로 ‘팬덤(Fandom)’이다. 예컨대 얼마 전 방탄소년단의 지민이 입었던 옷이 경매에 나왔을 때 관건은 세탁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즉 온전히 그의 체취가 남아 있어야 한다. 만약 지민의 팬이 아니라면 그 옷은 그냥 더러운 옷일 뿐이다.

셀럽 구혜선의 그림에 대해서 젊은 화가가 혹평을 한 방송 내용이 논란이 됐다. 이에 대해서 구혜선이 반박을 하기도 했다. 요점은 “예술에 절대적인 법칙은 없다.” 젊은 화가의 지적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미술의 기본조차 모를 것 같은 배우가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 불쾌함이 있을 수 있겠다. 그 불쾌함의 근원은 구혜선의 그림이 전업 화가보다 더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겠다. 그는 많은 작가들이 구혜선보다 많은 세월에 걸쳐 노력을 많이 하는데도 전혀 존재감을 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공정하지 못한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달라진 미술 환경을 생각하지 못하면 곤란해진다. 이는 문화예술 수용구조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화가는 입시를 거쳐 대학에서 교수, 평론가, 선배들의 평가를 거쳐 활동하는 작가들의 노고를 말했다. 이는 비단 미술만이 아니라 문학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학이 위기라지만 문단 중심의 문학은 위기여도 웹소설이나 웹툰은 전대미문의 호황이다. 이유는 팬들이 원하는 작품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미술 시장의 위기와 또 다른 기회는 팬덤에 있다. 뮤지컬이 활성화된 데에는 아이돌들이 기여했듯이 말이다.

구혜선의 그림이 주목을 받는다면 노이즈를 일으켜주는 논객들이 있기 때문이거나 그에게 팬덤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기획사와 관련 기업들이 팬 커뮤니티 비즈니스 플랫폼을 만드는 이유다. 구혜선의 그림이 형편없더라도 구혜선이 그렸기 때문에 선호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작품은 유효하다. 더구나 구혜선이 직접 그린 점에서 아우라가 있다면 더욱 이런 점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걱정 말일이다. 구혜선의 그림에는 정통 미술 전공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팬심이 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정통 미술인들의 팬덤이라면 교수, 평론가, 선후배 그리고 화랑일 수 있다. 문단이라는 토대에 너무 강고하게 의존했던 문학의 사례를 경계 삼을 필요는 있다. 더구나 그들의 팬심은 그렇게 대중 스타에게 쏟아지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모를 수 없다. 아니 정통으로 그림을 전공한 사람들이 더 유리할 수 있다.

대중 스타들의 인기는 배우 윤여정 말대로 한순간이기 때문이다. 구혜선 외에도 많은 연예인들이 그림을 그려 주목을 받았지만, 곧 조용해졌다. 다만 조영남처럼만 하지 않으면 된다. 개념 미술도 아닌데 개념 미술을 흉내 내고 전문작가를 속여 그리게 하고, 자신의 작품인 듯 전시회를 통해 팬들에게 판매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니면 된다. 법원 판단은 대중에게 부차적이다. 경영계는 ESG 즉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 열풍이 강하다. 그 핵심은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의 윤리 도덕도 더 중요하다는 개념이다. 아무리 아우라가 있고 팬심이 있어도 도덕적 윤리적 정당성이 없다면 외연이 확장되지 않고, 동네잔치에 머물다가 사라질 터이다. 지금 미술계의 위기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계기는 될 것이다.

다만 구혜선의 그림에서 출발해 미술 작품의 세계에 관심을 갖는 문간 발들여놓기도 있을 수 있다. 비판을 하는 자나 비판을 받는 자나 미술계에 대한 관심 환기라는 점에서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상생의 관계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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