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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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에서 사대부라면 관기와 잠자리를 같이하거나 축첩(畜妾)도 가능했다. 그러나 유망한 신진사류들은 이를 꺼렸다. 사회 규범상 문제가 안 됐으나 ‘호색한 인물’이란 부정적 평가 때문이었다.

선조 때 괴산현감을 지낸 조원(趙瑗)도 첩을 들이는 것을 두려워했다. 양반의 서녀로 시를 잘 지었던 옥봉이 첩이 되고자 적극적으로 나왔을 때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출세가 막힐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부(祖父)가 나서 ‘괜찮다’고 권유하자 할 수 없이 승낙한다. 조원은 첩으로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옥봉에게 일체의 시를 짓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시 속에 파묻혀 살던 문학소녀는 결국 남편과의 약속을 어기고 시를 지었다. 조원은 이를 구실로 매몰차게 옥봉을 쫓아낸다. 옥봉이 친정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원의 집 주변에서 움막을 짓고 살아도 나 몰라라 했다. 그녀가 바로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이자 명나라에서 작품을 알아보고 먼저 시집을 내준 옥천 출신 이옥봉이다.

한때 전라감사를 지낸 정철(鄭澈)은 남원 기생과 매우 뜨거운 사랑을 했다. 송강은 시간만 되면 전주에서 남원으로 달려가 함께 풍류를 즐겼다. 기생의 이름마저 송강의 강(江)자를 써 ‘강아(江娥)’라고 불렀다.

강아는 송강이 북변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남장으로 따라갔으며 병석에 눕자 집으로 달려가 간호해 임종을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강아와의 염문이 정적들의 성토대상이 됐으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입줄에 오르내렸다.

허균(許筠)의 여성관은 자유분방했다. ‘여자를 가까이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천성이라 내 자신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명기 매창(梅窓)이 친구의 애인임을 알면서도 부안까지 내려가 밤늦도록 수작하고 풍류를 즐겼다. 허균이 구애했으나 매창은 대신 다른 여자를 방으로 들여보냈다. 허균은 상중(喪中)에도 기생과 관계했다. 그가 비극적인 운명을 맞을 때는 이것이 모두 허물이 됐다. ‘패륜하였다’고 광해군까지 혀를 찼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퇴계는 단양군수 시절 어린 기생 두향과 염문이 있었으나 고향으로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녀가 선물한 매화 한그루만 가지고 낙향했다. 퇴계의 매화 시에는 두향을 잊지 못하는 간절한 마음이 숨겨져 있다.

율곡은 아름다운 기생 유지와의 그윽한 마음을 술회한 유지사(柳枝詞)라는 시를 남겼다. 이 시를 보면 얼마나 굳은 결심으로 여인을 경계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유지와 여러 번 만나 같은 방을 쓰면서도 끝내 도를 허물지 않았다.

명종 때 선비 성제원(成悌元)은 청주목사가 동행시킨 춘절이라는 기생과 속리산을 여러 날 함께 구경하면서도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천하일색 황진이를 옆에 두고도 목석같이 대한 학자 서경덕(花潭. 徐敬德). 결국 황진이는 최고의 절개 남으로 엄지 척 하고는 평생 존경하게 된다.

차기 대권 가도의 유력 후보군 가운데 거물급 지자체 단체장들이 성 추문으로 잇따라 낙마했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극단적인 선택을 해 충격을 주었다. 언론의 보도 내용을 보면 피해자의 호소에도 불구 비서들이나 측근들의 충언이 없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이성에 대해 호감을 갖는 것은 천성이다. 큰 인물을 꿈꾸고 있는 정치인이나 단체장이라면 집무실을 개방하고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고금 유명인 가운데 여자문제로 인생을 그르친 사례가 많아 고사를 반추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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