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사슴의 시인, 평생을 독신으로 고독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하여 한국 문학에 이름을 남겼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친일 시와 산문을 써서 조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와 징용에 몰아넣은 반민족 친일 행위를 했다. 이후 북한군에 점령되었을 때와 다시 수복했을 때 그때그때마다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일신의 안녕과 영화를 추구했다.… 보통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기자, 소설가, 작가, 언론인으로도 활동했다.’ 

이상이 노천명(1912~1957) 시인에 대한 개략적 평가의 일부분이다. 노 시인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황해도 장연(長淵)군에서 출생해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인 서울로 와서 중고등 학창시절을 마치고 1930년 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입학하고, 졸업한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해 4년간 학예부 기자로 근무했다. 이때에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하는 시인의 대표적 시 ‘사슴’을 발표했고, 그 후 1938년까지 조선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여성(女性)’지의 편집인이 됐으니 시인, 기자, 언론인으로서 유명세를 떨쳤다. 

그렇지만 일제 말기에 징용 찬양시나 6.25전쟁 중 보인 활동의 이중성으로 인해 옥고까지 치렀고, 노 시인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1957년 2월 뇌빈혈로 입원했다가 어느 정도 회복되자 치료비 부담으로 퇴원해 자택에 있었던바, 그 후 넉달만인 6월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음을 맞이했던 손바닥만한 낡은 집에서 앉은뱅이 책상과 몇 권의 책밖에 변변한 가재도구도 없었고, 시신을 수습할 친척 동료가 없어 천주교회 신자들이 수습해 줬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대학시절 시 발표로 문단에 데뷔해, 신문사 16년 중앙방송국 5년 총 21년간을 언론인으로 살았던 그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피해갈 수 없었던 시대상황에 휘둘린 탓도 있거니와 어쨌든 친일파 시인, 반민족행위자라는 족쇄가 채워졌던바, 그와 상관없이 엘리트 여성, 한 인간의 삶으로서 불행한 인생역정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학생들과 젊은이들의 입에 꾸준히 회자되고 있는 ‘푸른 오월’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등 노 시인의 수많은 명시를 보면 봄날의 서정에 눈물 고이게 하는 맑은 시심이 돋보인다. 그 중에서도 ‘어제 나에게 찬사와 꽃다발을 던지고/ 우레 같은 박수를 보내주던 인사(人士)들은/ 오늘은 멸시의 눈초리로 혹은 무심히/내 앞을 지나쳐 버린다./ 청춘을 바친 이 땅/ 오늘 내 머리에는 용수가 씌어졌다.//’ 이 ‘고별’ 시에서는 회한이 많았던 비운의 천재 시인이 겪었던 시대상황의 아픈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노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63년째인 올해 6월, 어쩌다 노천명 시인의 유언장 같이 들리기도 하는 ‘고별’ 시를 다시금 읽어보면서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의 불안함을 짚어본다. 특히 원칙도 없고, 정의도 없고, 오직 자기편의 이익을 위해 온갖 술수를 다쓰는듯한 정치를 떠올리게 됨은 대체 왜일까? 어제까지만 해도 “잘했다”고 끝없는 찬사를 보내고, 또 “잘 한다”고 우레 같은 박수를 쳐주던 여권 인사들이 오늘은 미운털이 박힌 한 사람에게 용수를 씌우려 안달하는 세상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이 같은 상황이 클로즈업되면서 필자는 왜 노천명 시인의 ‘고별’ 시에서, 배경도 내력도 다른 윤석열 검찰총장의 일이 겹쳐지는 건지 필자 자신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제까지도 찬사와 박수를 보내주던 사람들이 이제는 찍어내기에 혈안이 되고 있으니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의 진수를 알만도 하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박근혜 정권에서 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을 파헤치다 그 팀이 해체되고, 지방부서로 전출되는 등 인사 불이익과 온갖 시달림을 받으면서 검찰 초심의 정의심만은 잃지 않았다. 그러했던 그가 문재인 정부의 제2기 검찰총장에 임명받으면서 ‘살아있는 권력에도 엄중하라’는 지엄한 명을 받았다. 그 후 윤 총장은 국가․사회의 정의를 위해서라면 청와대와 관련된 의혹도 마다않고 수사해온즉, 송철호 울산시장 선거의혹, 청와대의 개입 의혹과 함께 최근 불거지고 있는 여권인사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라임자산운용 사건 등 일연의 수사를 진행하자 여당에서는 “현 정권에 칼을 들이대는 것”이라며 하나같이 비토하고 나서고 있다. 

최근 여당 지도부가 턱도 없는 가정법까지 사용해가면서 ‘윤 총장 흔들기’에 혈안이다. 설훈 민주당 최고위원은 19일 방송에 출연해 “검찰총장 임기가 있다고 하지만 이런 상태로 법무행정, 사법행정이 진행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내가 윤석열이라고 하면 벌써 그만뒀다”는 말 ‘아이 위시 아이위어(I wish I were)’ 용법까지 써가면서 헐뜯고 있는바 제3자가 나설 일은 아니다. 사퇴하든, 임기를 다 채우든 윤 총장의 몫이다. 개인문제가 아닌 검찰총장 거취에 국민적 관심사가 큰 현실에서 정부여당은 권력으로부터 검찰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2년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 찍어내기’라는 하수(下手)는 빨리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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