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경험이 학습보다 더 귀중한 지식’이란 걸 새삼스럽게 실감한다. 오래 전 일이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시골에 가면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주로 입에 담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우리사회에서 떠도는 중요이슈이고, 정치와 관련된 것들이다. 정치인 누구를 두고 ‘정치 9단입네’라고 하지만 시골 노인들도 정치 현상을 읽는 고단자들이니 그들의 말이 틀리든 옳든 간 나름대로는 경험적 정치철학에서 나오는 말들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골 노인들은 무슨 이야기든 갑론을박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에서는 한 치도 밀리지 않으려는 듯 옹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며칠 전 오랜만에 시내로 나가면서 버스를 탔는데, 80대 할아버지가 버스 뒤 칸에 앉아 앞 칸 승객들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말하곤 했다. 자연스럽게 들리는 말은 ‘버스가 자꾸 덜컹거린다’는 불평이다. 정말 버스가 오래돼서 엔진소리부터 요란하고 시내 도로를 가면서 자꾸 덜컹거리니 승객이 괴롭다는 것이고 이런 차는 폐차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느닷없이 “요즘 이십대 아이들이 살아가는데 참 고생이 많다”고 말한즉, 자신 같은 늙은이야 조금 더 살다가 가면 그만이지만 “젊은 청년들이 살아가기가 힘 드는 형편없는 나라”라고 말했다. 

하차하면서 몇 마디 말했는데, 핵심은 세 가지 정도였고 주로 이러하다. 첫째는 정치인들이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정치해왔지, 국민을 위해 정치하고 있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회단체라는 것들이 돈 맛이 들어 자기가 돈 빼먹으려고 앞장서서 한다는 것인데, 꼭 누구를 찍어서 한말은 아니지만 최근에 문제가 된 내용을 에둘러 그렇게 표현하는 것 같이 들렸다. 세 번째는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을 때는 좋겠지만 빚만 남겨놓으면 가뜩이나 허리가 휘청대는 청년들이 나중에 그 빚을 갚아야하는데 어쩔 거냐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대충 살다가 이제 죽어도 그만인 늙은이가 차라리 낫다는 말이었다.

그 노인이 차에서 내리고 난 뒤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분 말씀에 틀린 데가 없다. 현실정치에서 정치인들이 말만하면, “국민을 위하네” “민생이 우선이네”하면서도 실상은 자기 정당이 우선이고 자신이 먼저다. 이번 21대 국회에서 의회민주주의 표상인 여야 간 협치를 내세웠지만 국회의장을 선출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53년 만에 제1야당이 참석하지 않은 그 자체에 여당이 무어라고 해도 문제는 문제로써 불거진 것이다.

도대체 민주정치는 왜 존재하고, 여야 협치라는 것은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정치라는 것인가. 정리가 되지 않는 현실이다. 이쯤 되고 보면 20대 국회를 두고 ‘식물국회’니 ‘동물국회’니 하고 역대 국회사상 ‘최악의 국회’라 낙인찍었지만 21대 국회 초기에 보여주는 장면에서 본다면 앞으로 여야는 더 갈등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국민 바람과는 반대로 여당은 수적 우세를 믿고 의정을 계속 밀어붙일 테고, 제1야당은 이에 질세라 의원들이 똘똘 뭉쳐 더 강하게 반발하고 여당에 대해 반대하고 나선다면 어쩌면 20대 국회보다 더 최악의 상황을 맞을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국회상을 맞게될 것이 걱정되는바, 민주주의 의회의 더 큰 위기가 오기 전에 정신 차려야 한다. 사회단체에 대해서 돈만 밝히고 돈 빼먹으려고 앞장선다는 이야기도 틀린 말은 아니다. 대다수 사회단체가 특정분야의 약자들, 소수입장이나 서민들을 위해 대변하고 밝은 사회를 위해, 또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한 공로가 크지만 사회 지탄을 받는 일부 단체의 경우 문제점이 많다. 꼭 어느 단체라고 지정하지 않아도 회계불투명이나, 국민과 법인 등에서 기부하거나 모금한 돈을 마치 자신들의 쌈짓돈인양 단체 임직원의 보수나 활동비로 쓴 사례가 많다고 하니 사회를 밝히는 등불이 아니라 밝은 사회에 태풍과 어둠을 몰고 오려는 무리로 전락한 현실이다.

서두에서 예를 든 80대 노인의 말처럼 승객에게 불편을 주는 고물차는 폐차해야한다고 한즉, 젊은 청년들에게 피해를 주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고통을 주는 정부에 빗댄 것은 아닐지라도 여하간 뉘앙스가 이상한 점은 사실이다. 정치가 국민갈등 해소가 아니라 이념을 부추기며 국민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들었다.

시민통제가 느슨하고 정부가 무관심한 사이 시민단체는 점점 권력화 돼가면서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어 엉키고 있으니 이 또한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 고물버스에 탔던 다른 승객들은 덜컹거리는 차보다 노인의 큰 소리가 더 불편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 노인 말을 다시금 새겨보니 사회 불평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바른 말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노인은 소위 말하는 ‘라테 이즈 홀즈(나 때는 말이야)’ 같은 꼰대이야기가 아닌 우리사회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었음을 부인할 바 없다. 그 분의 학문적 지식에 대해선 모르겠으나 ‘경험이 학습보다 더 귀중한 지식’이란 것을 실감하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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