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안성 무한산성 석축
안성 무한산성 석축

백제 판축 위에 보축한 고구려식 석축 잔해

이 성은 고성산 능선을 따라 테메식으로 둥글게 쌓은 성이며 내성 구간이 석축으로 축조되어 있다. 성이 연결된 좌우 능선을 따라 평지의 입구를 막았으며 포곡식을 이룬다. 옛 지도에는 덕봉서원 왼쪽에 고성산(高城山), 무한성(武捍城), 백운산(白雲山)이 그려져 있다.

안내판에는 현재 잔존성벽은 북벽 상면 폭이 약 2.8m, 외벽 높이가 4m, 내벽 높이가 약 0.8~1m이며, 서벽은 외벽 높이가 약 4m 이상, 상면 폭이 2.2m, 내벽 높이는 2m 내외라고 기록하고 있다.

글마루 취재반은 무한성을 답사했다. 코로나19 맹위로 위기가 팽배한 3월, 이제 완연한 봄기운을 맞으며 산성으로 올랐다. 처음 성벽을 보고 놀란 것은 정연한 판축으로 쌓아진 것이었다. 이 축조 방식은 분명 백제였다.

성벽을 오르면서 마한 시대 토기편과 백제 와편, 고구려 적색기와를 찾으려 노력했다. 이런 기대는 성벽 아래에 무수히 산란한 적색기와를 발견하면서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최근에 조사한 독산성에 버금가는 많은 적색와편이 찾아진다. 왜 성벽 위에서 이렇게 많은 와편이 산란하는 것일까. 사격자문(斜格字紋), 승석문(繩席紋) 선조문(線條紋) 등 다양하다.

판판한 좁은 도로 같은 성벽 위에서는 연질의 백제와편도 다수 찾아진다. 마한시대 조질 적색토기까지 수습된다. 이 성의 역사가 초기철기 시대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고구려가 이 성을 점령한 후 성벽을 보축하면서 불타 흩어진 건축부재를 넣고 다진 것인가.

이후 고구려성을 점령한 신라군은 같은 방식으로 적색기와 편들을 모아 성벽을 보축했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기 초기 흙으로 다져 쌓은 판축 성벽은 안성 도기동, 천안 직산 사산성 등에서 찾을 수 있는 모양새다. 이 성은 사복홀 이전부터 읍성으로도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의 끝 능선이 평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지난달 여주 파사성의 성벽에서도 마한, 백제시대의 판축성을 찾았다. 파사성의 백제 유적은 성의 남쪽 편 유구이다. 성벽의 내면은 기왕에 쌓은 마한, 백제 성벽이고 외면은 석축을 한 형태이다. 이곳에서 조질 와질토기 그리고 유백색의 백제 연질 토기편을 많이 발견했다.

이런 형태가 사복홀 무한성에서도 나타난다. 글마루 취재반은 성의 기저에서 돌을 옥수수 알처럼 다듬어 쌓은 무더기를 찾았다. 그러나 그 규모는 오산 독산성이나 여주 파사성과 같이 완전하고 크지는 않다. 아마 오산의 독산성이나 여주 파사성에 치우친 노력 때문에 이곳에 많은 인력을 투입할 수 없었던 것 아닌가. 그러나 토사에 묻힌 성 밑의 흙을 제거하면 보다 많은 고구려식 석축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양구 비봉산성의 경우도 토사에 묻힌 성 밑을 조사했을 때 고구려 축성형태를 찾은 예가 있다. 이 성에 대한 안성시 당국의 관심과 역사 규명 의지를 기대해 본다.

이 성에도 고구려식의 치성(雉城)이 있음을 확인했다. 서쪽 편 성벽은 여러 차례 굴곡지게 하여 적들의 공격을 효과 있게 방어할 수 있도록 했다.

고구려 와편
고구려 와편

성 안 운수암의 신라 비로자나 좌불

운적암(雲寂庵)이라고도 불린다. 무한성 안에 있으니 호국 사찰로 지어진 것인가. 1983년 9월 19일에 경기도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영조 26(1750)년에 장씨 부인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창건연대를 더 올려 잡을 수도 있겠다. 비로전 안에 있는 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고려 초기 소작으로 추정된다. 일설에는 청상과부가 부처를 모시려고 무양산성 밖에 터를 닦았는데, 꿈에 노승이 나타나 성 안에 절을 지으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 가서 쓰러진 풀과 나무를 치우고 보니 절터로 적합하여 이 암자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운수암은 한말 풍운아 흥선대원군과도 인연이 있다. 사적기를 보면 고종 7(1870)년에 대원군이 시주하여 중건되었으며 운수암(雲水庵)이라고 쓴 현판을 내렸다고 한다. 30여 년 전에 대웅전이 중건되었는데 중앙 높은 터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비로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이다. 비로전의 내부에는 석조 비로자나불좌상이 중앙 불단 위에 봉안되어 있다. 약 60년 전에 바깥에서 눈비를 맡던 불상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불상의 연대를 봐서도 이 사찰의 창건 역사인 조선 후기를 훨씬 뛰어넘을 수 있다.

이 불상은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상으로 손은 지권인(智拳印)을 결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불상으로 불린다. 지권인은 법신(法身) 비로자나(毘盧舍那)의 수인으로 ‘능히 무명(無明)의 암흑을 깨뜨리는 지혜’라는 의미를 지닌다. 지권인의 비로자나는 신라 하대에 널리 유행한 불상이다. 연화좌는 육각형이며 예불대에 가려져 있는데 조각이 매우 사실적이다.

머리는 나발이며 육계가 크게 마련되어 있다. 상호는 둥글고 원만하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비량(鼻梁. 코)은 마모되어 후대에 보수한 듯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나 보수한 흔적이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유려하며 양 소매에 걸쳐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당당한 어깨, 상호의 원만함과 유려한 조각 수법 등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2호로 높이 109㎝이다.

안성 무한산성 안 운수암의 비로자나불좌상
안성 무한산성 안 운수암의 비로자나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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