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플라워호는 청교도가 영국의 핍박을 피해 1620년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건너가면서 탑승했던 배다. 청교도는 이후 정착하며 인디언을 학살했다. 사진은 메사추스 항구의 메이플라워호 복제선.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메이플라워호는 청교도가 영국의 핍박을 피해 1620년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건너가면서 탑승했던 배다. 청교도는 이후 정착하며 인디언을 학살했다. 사진은 메사추스 항구의 메이플라워호 복제선.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청교도 102명, 영국 박해 피해

메이플라워호 타고 신대륙에

인디언과 화친 후 옥수수 농사

관계 틀어지자 인디언 학살

인류역사에서 탄생으로 한 시대의 기준이 된 예수로부터 시작된 기독교가 시작부터 그 부패함을 드러내며 걸어온 세월이 어느덧 2000년이 넘었다. 그간 기득권, 기성, 주류 등 다양한 수식어와 함께 불려진 기독교는 돈‧권력‧성‧정치 등 세상적인 이권과 야합하며 본질을 잃고 분열하며 신뢰를 잃어갔다. 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는 하늘에 닿았다. 어두운 시대 속, 새 시대 새 종교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절규에 대한 답이 무엇일까. 본지가 예수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역사를 통해 살펴봤다.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후 칼빈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들은 영국을 청교도들의 국가로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영국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절대예정론을 주장한 칼빈이 ‘살인’까지 자행하면서 앞세웠던 신앙을 본받기라도 하듯 원주민인 인디언을 학살했다. 미국 장로교의 시초인 이들 청교도는 오늘날 한국 장로교의 뿌리이기도 하다.

◆영국 박해 피해 아메리카 개척한 청교도

마틴 루터 등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의 ‘교회지상주의’를 ‘성경지상주의’로 바꿨다. 가톨릭은 교황과 교회의 전통을 중요시했으나,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하고 말씀의 권위를 회복시켰다. 성경에 위배되는 교회의 전통은 개혁의 대상이 됐다.

가톨릭의 선한 행위나 공로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바탕으로 제작된 면죄부는 개혁 대상 1순위였다. 만인제사장(萬人祭司長)을 주장한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개혁자들의 신앙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다. 이들은 철저히 이단으로 정죄됐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이단척결을 위한다며 사도적 청빈을 강조한 탁발 수도회를 이용했고, 교황 직속의 종교재판소를 설치해 혹독하게 대처했다. 일례로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이단 색출을 위한 특별 대리인을 임명하고 자신이 직접 심문했다. 그레고리 9세는 이단 억압을 위해 정규 상설기관을 설립했다.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개신교도 종교개혁 후 얼마가지 못해 똑같은 모습이 됐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칼빈(J. Calvin)이 그 중심에 있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국이라는 특별기구의 수장으로 재임한 칼빈은 절대예정론을 주장했고, 수많은 주석을 만들고 ‘기독교강요’를 저술했다. 칼빈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이단 척결 행태와 오버랩 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칼빈이 사형시킨 인원만 58명이며, 추방한 인원도 76명이나 된다. 나아가 칼빈 추종자들이 저지른 ‘마녀사냥’까지 포함하면 수천명에 이른다. ‘유럽의 마녀사냥’ 저자 브라이언 레벡(Brian P. Levack)은 “칼빈사상이 지배하던 스위스에서는 8800명 이상의 여성이 마녀로 재판을 받고 5000명 이상이 처형됐다”고 저술했다.

마녀로 결론 나면 표적이 된 사람의 재산은 재판관이나 법원관리들의 몫이 됐다. 유럽의 마녀사냥은 포식자들이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없을 때야 비로소 끝을 맺었다.

◆ 남의 땅에 정착해 벌어진 살인과 학살

유럽의 종교개혁기에 영국 성공회 신도 일부는 칼빈 신학을 받아들여 성공회에서 벗어나 청교도라는 세력을 형성했다. 청교도라는 명칭은 당시 개혁파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가톨릭 성직자들의 화려한 의복 등에 반발해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배의 순수성(Purity)을 강조하는 데서 비롯됐다.

청교도는 영국 시민전쟁 때 크롬웰(Oliver Cromwell)을 지지하고 그를 교인으로 만들었다. 전쟁에 승리한 크롬웰은 찰스 1세 왕을 교수형에 처하고, 크리스천들이 호화스럽게 즐기는 크리스마스를 불법화했으며, 영국 전체에 화려한 색깔과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금지하도록 했다. 다시 말해서 칼빈주의 장로교 즉 청교도가 통치하는 영국을 만들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스튜어트 왕가에 의해 다시 왕정이 복구되자 그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던 영국인들은 청교도를 몹시 증오하며 일종의 보복으로 많은 청교도를 처형했다.

이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오늘날 미국의 기초가 됐다. 1620년 9월 102명의 ‘필그림(청교도 순례자)’들이 낡은 배 메이플라워에 몸을 실었다. 죽음을 넘나드는 항해 끝에 아메리카 플리머스에 도착했지만 절반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한겨울의 혹한 속에서 플리머스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 집을 지었다. 1621년 2월 플리머스에 인디언이 나타났고, 청교도들은 강철 대포 6문을 설치했다. 영어를 구사하는 인디언의 중재로 같은 해 3월 22일 청교도와 인디언 간 우호조약이 체결됐다. 청교도들은 인디언과 화친을 맺고 인디언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배웠고, 옥수수를 심고 고기를 잡으며 열심히 일해 그해 10월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됐다. 카이버, 부레스포스, 윈슬우, 부로스터를 중심으로 생존자 55명과 협조했던 인디언 100여명을 초청해 3일간 축제를 베풀고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이었다는 게 일반적인 학설이다.

절대예정론을 주장하며 신앙이 다른 자를 인정하지 않고 살인까지 자행한 것으로 전해지는 존 칼빈. (출처: 위키백과)
절대예정론을 주장하며 신앙이 다른 자를 인정하지 않고 살인까지 자행한 것으로 전해지는 존 칼빈. (출처: 위키백과)

◆ 인디언 학살자의 후손, 미국 장로교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메리카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인디언의 호의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식량과 사냥감을 얻기 위해 인디언 마을을 약탈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무력을 이용해 거래(혹은 조약)에 도움이 되는 부족 지도층을 교묘히 빼돌려 강제조약을 공표한 뒤 살해하거나 강압적으로 조약을 체결해 저항하는 인디언들을 학살하는 방식을 취했다.

너새니얼 필브릭 저서 ‘메이플라워’에서는 당시 상황에 대해 “위기일발의 상황이긴 했으나 먼저 살인과 학살을 감행한 것은 필그림들이었다! 메사추세츠 족 인디언들은 필그림을 ‘와타퀴네지’라고 불렀다. 살인자라는 뜻이었다”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당시 네덜란드 라이덴에 남아 있던 존 로빈슨 목사가 인디억 학살 소식을 듣고 보낸 편지 내용도 인용했다. 당시 로빈슨 목사는 수신자 브래드퍼드에게 “오, 그토록 잔인하게 모두 죽여 버리다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일단 붉은 피가 넘쳐흐르기 시작하면 오랫동안 멈추지 않는 법이오. 그들이 당해도 싸다고? 그렇다 해도 그 유혈 사태를 굳이 그리스도교인이 도발해야만 했소?”라고 반문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추수감사절에 반기를 든다. 이들은 1975년부터 반(反)추수감사절 행사를 열며 억울하게 죽은 조상들을 추모하고 있다. 지난 2005년 11월 24일 북아메리카 원주민 3000명은 인디언 권리운동의 성지(聖地)인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라즈 섬을 찾아 추수감사절이 아닌 추수강탈절이라고 분노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사회학과 댄 브룩 교수도 미국인들의 추수감사절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그는 “추수감사절을 자기성찰적 집단 단식을 하는 국가적 속죄일로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왔으나, 자신들이 받았던 서러움을 망각하고 신대륙에서 다른 사람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유럽에서 이미 끝난 마녀사냥을 아메리카 대륙에서 시작했다. 이단이기 때문에 마녀이고 마녀이기 때문에 이단이란 식으로 사람을 잡아 처벌했다.

일테면 1657년 10월 14일자로 보스턴 법정에서 공표된 한 법조문에서는 ‘첫 번째로 잡힌 남자 퀘이커는 귀를 하나 자르고 자비로 형무소에 보낼 것이며, 두 번째로 잡히면 나머지 귀를 마저 자른다’는 등의 무자비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청교도들의 이러한 행동은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자행했던 ‘마녀사냥’과 맥을 함께한다는 것이다. 청교도 역시 칼빈의 영향을 받아 신앙이라는 미명 아래 인디언을 학살한 것이라며 불편하게 보는 시각도 이에 근거한다.

인디언 학살의 장본인이었던 이 청교도들이 바로 한반도에 장로교를 안착시킨 미국 북장로교의 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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