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4개 부문 수상작이 되면서 반지하방이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반지하방은 우리 사회에서 한 번도 주목의 대상이 돼 본 적이 없다. 이번이 처음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걸 계기로 외국 언론이 반지하방에 주목한 덕이다. 우리나라 언론은 우리 사회의 치부라 할 수 있는 반지하방을 외면해 왔는데 반해 외국 언론이 주목을 해서 공론화 되고 있다.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나라 언론은 영국 BBC, 아사히신문, 워싱턴포스트 등의 기사를 전하고 있다. 사실을 전하고 있긴 하지만 외국 언론이 말한 중요한 내용은 빠트리고 전하는 경우가 많다.

BBC는 방송에서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BBC는 2018년 유엔이 한국이 “11대 경제 대국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부담 가능한 주택의 부족이 특히 청년과 가난한 사람에게 실질적인 장벽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햇빛 안 들어오고 습기 차고 곰팡이 피는 반지하방에서 가난한 청년들이 살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 언론이 이 내용은 쏙 뺐다.

우리나라 언론들은 BBC가 “치솟는 집값을 감당할 수 없는 많은 한국 젊은이가 이곳에 살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한다. ‘미래’와 ‘노력’을 강조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실상 파악에 도움이 되는 말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반지하방 거주자 입장에서 볼 때 BBC가 말한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은 한국이 경제력은 강한데 주거는 극도로 불평등하다는 말이다. BBC는 반지하 거주 문제가 사회 불평등과 주거 불평등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 언론들은 BBC 방송의 원문을 번역하면서 서울지역 반지하방에 “수천명이 산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여러 언론사와 기자들은 서울지역 반지하방에 수천명만 사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수만 단위도 아니고 수십만 단위에 이른다는 걸 몰랐을 리 없다. 영어 ‘thousands of’는 ‘수천’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수많은’이라는 뜻이 일반적이다. BBC기자가 ‘수천명’이라고 쓰려고 했다면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확인했을 것이다.

서울지역 반지하방에 ‘수천명’ 산다는 통계는 없다. 통계청은 지난 2015년 반지하 또는 지하에 사는 가구가 36만 3천 가구에 이른다고 밝혔다. 통계는 서울에서만 23만가구가 지하방에 산다고 말하고 있다. 평균 2.5인으로 보면 57만명에 이르고 2명씩 산다고 하면 46만명에 이른다. 4년의 세월이 흐른 걸 감안하더라도 ‘서울에만 수십만명이 산다’고 표현해야 맞다. 국내 언론사가 사실을 몰랐다고 보는 건 상식에 맞지 않기에 ‘반지하 주택의 규모를 축소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지 않나’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진실을 왜곡하는 건 문제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기생충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반지하 문제를 공론화했다는 데서 찾고 싶다. 영화 기생충은 대한민국에서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한 것이다. 반지하 거주 실태를 대한민국은 물론 전세계에 알린 공헌은 꼭 기억해야한다. 진실이 알려지면 해결의 실마리가 열린다.

지난 6월 개봉되어 1천만 관객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할 때도 국내 언론은 조용했다. 아카데미상 4개 부문 수상을 했다는 뉴스가 뜰 때도 조용했다. 이 점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지난 50년 사이 반지하방이 계속되는 동안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반지방의 ‘반인권성’에 대해 무감각해진 것일까? 의도적으로 회피한 건 아닐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무엇일까?

기생충의 반지하방 세트장을 복원한다고 한다. 복원 좋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 반지하방 거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해결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지하 거주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공유하는 과정이 있어야한다.

정치권은 한가하기만 하다. 반지하 거주의 반인권성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