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하나를 두고 두개의 진영이 매일 또는 매주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미친 듯이 일방적인 주장만 하고 소리치는 나라,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지난 박근혜 정부 때는 국민 모두가 하나 되어 정부를 향해 소리쳤지만, 현 문재인 정부 하에서는 마치 배수진이라도 친 듯 극렬하게 대치되는 두개의 엇갈린 주장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미친 듯이 설치고 있다. 

지난 정권은 부정과 부패로 잘못되니 국민은 하나로 모아졌고, 현 정권은 잘못되니 일사불란하게 두개의 국민으로 양분돼 결사항전을 방불케 하고 있다.

앞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됐고, 뒤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이 됐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오늘 우리는 과연 어느 정권이 더 나은가를 물을 수밖에 없는 모순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비극의 주범이며 어쩌면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얼핏 본능적으로 계산이 되는 것은 하나 되게 했는데 다시 둘로 갈라 놨으니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온 지구촌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조선 반도는 남과 북이 둘로 갈라져 철천지원수로 살아 온지 반세기를 넘기고 한 세기를 바라보고 있고, 또 쪼개진 그 곳 한반도는 세대와 이념과 종교와 진영과 가족까지 완전히 갈라져 공중분해 되기 일보직전이니, 이를 일컬어 말세지말이라 했던가.

이제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누가 이런 나라를 만들었는가. 지도자의 잘못으로만 치부하며 자기 자신의 무지를 합리화시키려고만 하는 비겁한 자가 될 것인가.

경서에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니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니라”는 교훈이 있다. 앞선 소경은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며, 뒤에 따라가는 소경은 소경된 지도자를 따라가는 역시 소경된 백성이다. 그런 경우는 반드시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돼 있다.

본시 앞 못 보는 소경에 필요한 인도자는 눈 뜬 자가 돼야 할 것이며, 그것이 이치일 것이다. 그런데 소경된 자의 인도자마저 소경이라면 이치에 맞지도 않고, 그 결과는 불 보듯 훤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발견할 교훈은 우리 자신들이 소경이기에 나를 인도하는 자가 소경인지 아닌지를 분별하지 못했다는 깊은 성찰이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이러한 극단의 현상이 오기까지 필시 어떤 사연이 있고 이유가 없지는 않을 게다. 필자가 찾은 답은 이러하다. 인간의 근본을 탐구한다는 인문학 즉, 종교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종교성이 있어 종교를 추구한다. 자기가 부인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내면에선 늘 자아를 찾기 위해 애를 쓰니, 이것이 바로 종교성이며, 종교가 반드시 회복돼야 하는 이유다.
윤리와 도덕 나아가 상식의 가치가 무너져 버린 작금의 세상이 되고 말았으니, 그 발로가 되는 종교가 부패한 원인이다.
종교의 부패로 상식과 윤리가 무너져 스스로를 제어하고 성찰하는 기능이 마비되므로 인해, 오직 법의 판단에 맡기고 법에 의존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가치를 상실한 세상을 우리 스스로 자초했고, 우리는 그 속에서 종노릇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 윤리와 도덕으로 유지될 수 있는 즉, 자정능력이 사라진 기계적인 세상, 수동적인 세상, 마치 소경된 자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나를 이끌고 강제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해결 할 수 없는 이상한 나라가 됐고, 미개인들이 살아가는 나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진정한 민주국가는 법과 다수결이 판을 치는 나라가 아니다. 상식과 도덕이라는 가치가 근간에 흐르며, 또 그 가치가 최고로 인정받고 존중받고, 또 그것으로 해결이 가능한 나라가 참다운 민주주의 국가며, 법은 최후의 수단으로만이 족하면 될 것이다.
오늘날 검찰개혁이라는 화두를 멍에처럼 짊어져야 하는 현실이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자초한 것이지 누구에게 핑계 댈 일도 아니니,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우리가 묶은 것이니 우리 스스로 노력해 우리의 멍에를 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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