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고종황제(高宗皇帝)는 1918년 6월 미국유학시절 의친왕(義親王)과 웨슬레안 대학 동문이었던 김란사(金蘭史)를 의친왕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극비리에 특사로 파견해 민족의 독립의지를 표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렇다면 고종황제가 언제부터 이런 계획을 세우게 됐는지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본다.

고종황제가 덕수궁(德壽宮) 주변의 모든 민가들을 철거하였지만 유독 정동교회(貞洞敎會) 목사관(牧師館) 만큼은 철거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특사 파견 결정 후에 이 특사들을 파리까지 안전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손정도(孫貞道), 현순(玄楯), 최창식(崔昌植) 중에서 손정도, 현순은 감리교 목사로서 정동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역임하였다.

아울러 의친왕과 함께 선정된 또 다른 특사 김란사는 미국 유학시절에 의친왕과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파리에서 의친왕과 호흡을 맞춰 큰일을 할 거라고 고종황제는 예상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데 정동교회 담임목사를 3년 8개월 동안 시무(視務)했던 손정도가 1918년 6월에 갑자기 사임하는 뜻밖의 변수가 발생했다.

이후 손정도는 가족들을 이끌고 평양으로 이주하게 되며, 당시에 누군가를 분주히 만났다는 것으로 볼 때 무언가 급박한 움직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 3.1運動 秘史’에 나와 있는 33인들의 재판기록에 부분적으로 손정도와 관련된 내용이 언급돼 있는데 구체적으로 손정도도 본래 33인중의 한명으로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1919년 2월 15일 평양의 기홀병원에 있는 이승훈(李昇薰))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서 이승훈의 문병을 마친 이후 바로 그날 상해로 출발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3.1운동보다 더 중요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현순 같은 경우는 손정도의 경우와 같이 정동교회 담임목사를 1년 3개월 동안 시무하였으며, 3.1운동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기독교 측 인사들과의 회합에서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윌슨 대통령에게 우편물로 발송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상해로 파견하기로 결정됐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2월 21일 기독교 측 회합 시에 이승훈이 천도교 인사인 최린(崔麟)한테 받은 5천원 중 현순에게 1천원을 지원했다는 점인데, 파리강화회의 특사 파견에 사용된 자금과의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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