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18)
[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1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909년(광무 13) 경희궁(慶熙宮)에서 대한부인회, 자혜부인회, 한일부인회, 서울시내 각 여학교가 연합하여 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김란사(金蘭史), 박에스더, 윤정원(尹貞媛)을 위한 성대한 환영회를 개최했으며,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종황제(高宗皇帝)로부터 은장 훈장을 수여받았다.

1910년 9월 이화학당(梨花學堂)안에 대학과(大學科)가 신설되면서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이 실시되었을 때 김란사는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교수로 참여했으며, 4년동안 교수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와 더불어 부인성서강습, 교회활동, 어머니 육아교실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앨버슨과 함께 학생들을 지도해 거리와 농촌으로 나가 전도하는 활동도 열심히 했다.

1916년 미국 뉴욕 주 사라토가에서 열린 세계 감리교 총회에서 신흥우(申興雨)와 함께 참석하였으며 1개월간의 회의가 끝난 이후에도 홀로 남아서 순회강연을 열어 해외 교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으며, 순회강연에서 모금한 돈과 하와이 교포들의 주선으로 1918년 파이프 오르간을 구입하여 정동교회에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같은 평안남도 출신으로서 20여년 동안 친분관계를 맺어왔던 안창호(安昌浩)의 도움이 있었다.

1917년 9월 19일자 일본 시카고 영사가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기밀문서에 김란사가 1917년 9월 20일 의친왕(義親王)의 처남 김춘기(金春基)를 비롯하여 조선인청년 수명(數名)을 인솔하고 귀국길에 오를 예정이라고 보고했다는 점이다.

덧붙이면 대동단(大同團) 사건에 연루됐던 김춘기의 경무총감부(警務摠監部) 경찰서(警察署) 신문조서(訊問調書) 제1회에 나와 있는 내용 일부를 인용한다.

[ 21세때 美國에 건너가 네브라스카주 오마하로 가 聯合太平洋鐵道會社에서 서기로 근무하였으며, 1년동안 하다가 캘리포니아주 포클리市 캘리포니아官立大學校 商科에 입학해 1년간 수학하였고 大正6년(1917년) 10월 13일 京城으로 돌아와 原籍地로 돌아갔다.]

이와 관련해 김춘기는 의친왕의 최측근으로서 2년후에 추진하는 의친왕 망명 미수(義親王亡命未遂) 사건에도 깊이 관련됐는데, 김란사가 귀국길에 김춘기와 함께 동행했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와 같이 김란사가 귀국한 이후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깊은 관심을 보인 고종황제가 1907년(융희 1)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제2의 헤이그 특사 사건을 추진했으니 그것은 바로 파리강화회의 특사 사건이었던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