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17)
[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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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김란사(金蘭史)는 1894년(고종 31)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해 1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그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3월 일본유학의 길에 오르는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당시 한국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라는 점이다.

김란사는 처음에 자비(自費)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공부했는데 5월에 100여명의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들이 파견된 사실을 알게돼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자신도 관비유학생들과 같은 감독을 받기를 원한다고 청원했다.

이러한 김란사의 청원에 대하여 이완용은 수용했으며, 그 이후 외부대신 김윤식(金允植)에게 이러한 청원내용을 알렸으며, 이를 다시 일본공사에게 전달해 결국 김란사가 관비유학생들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됐으니 이러한 사실을 통해 김란사가 얼마나 적극적인 여성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란사는 게이오의숙(慶應義淑)에서 1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1896년(건양 1)에 귀국했다가 1897년(광무 1)에 미국유학의 길에 오르는데 처음에 워싱턴 D.C에 위치한 하워드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그 이후 워싱턴에 있는 데코네스 학원에서도 수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1900년(광무 4)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웨슬리안 대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6년의 과정을 이수하고 1906년(광무 10)년에 대망의 졸업을 하면서 문학사 학위를 수여받았는데, 이는 한국여성으로서는 최초의 문학사 학위를 수여받은 것이니 배움의 열망에 대한 구체적인 결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웨슬리안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던 의친왕(義親王)을 만나게 되며, 이러한 인연이 고종황제(高宗皇帝)가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과 함께 김란사를 특사(特使)로 파견하기로 결정한 배경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1906년(광무 10) 마침내 10여년의 미국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김란사는 상동교회에서 스크랜튼 대부인이 설립한 영어학교의 교사가 됐는데 이 학교는 불우한 형편의 여성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기혼여성(旣婚女性)들을 위한 학교였다.

여기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친 김란사는 이곳 학생들인 과부나 기생, 소실, 궁녀 등 불우한 여성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여성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으며, 이는 앞으로 민족문제에 관심을 두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김란사는 1907년(광무 11)부터 이화학당(梨花學堂)의 총교사 및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엄격히 지도했으며, 그해 이화학당(梨花學堂) 교사였던 이성회(李星會)가 조직한 이문회(以文會)라는 학생단체를 지도하면서 민족의 현실과 세계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는 선교사들과의 밀접한 관계와 미국 유학을 통한 국제정세의 인식이 어우러져 그의 민족주의관(民族主義觀)이 명확하게 정립됐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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