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고종황제(高宗皇帝)가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義親王)과 김란사(金蘭史)를 특사로 파견하여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하려던 계획은 뜻밖에 고종황제가 붕어(崩御)하면서 난관(難關)에 봉착했으나 김란사는 고종황제의 유지(遺旨)를 받드는 의미에서라도 거사는 반드시 추진되어야 한다는 사명감(使命感)을 가지고 손정도(孫貞道)를 만나러 베이징(北京)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손정도가 베이징(北京) 합달문내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하였기 때문에 약속이 연기되었으며 동포가 마련한 환영만찬에서 먹은 음식이 잘못돼 1919년 3월 10일 베이징(北京)의 미국 감리교회 부속병원인 부영병원(婦嬰病院)에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란사의 장례식(葬禮式)에 참석하고 온 선교사 벡커가 “그의 시체가 검게 변해 있었다”고 증언한 것이나 남편이 되는 하상기(河相驥)가 베이징(北京)을 다녀 와서 주위 사람들에게 “북경 가는 도중 봉천에서 어떤 동지를 만나 속뜻을 이야기 한 것이 오히려 그가 음해를 받은 원인이 되었다”것과 더불어 일본 스파이로 활약한 배정자(裵貞子)가 서울에서부터 미행하였다는 소문이 있는 등 독살 사망설이 있었다.

서론에서 고종황제가 붕어하였다는 내용을 언급한 바 있는데 어떤 배경에서 이런 불행한 사건이 발생한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본다.

고종황제는 1907년(융희 1)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하여 강제퇴위된 이후 덕수궁(德壽宮) 함녕젼(咸寧殿)에서 유폐(幽閉)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일제가 아무리 고종황제를 위협하여도 거기에 굴복할 황제가 아니었으며, 결국 일제가 고종황제를 독살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됐던 거사를 추진했다.

구체적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과 김란사를 극비리에 파견해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전세계에 호소하려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거사가 결행되기 전, 일제에 발각되면서 고종황제를 제거하려는 무서운 음모를 꾸미게 됐다.

그리하여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일제의 사주를 받은 궁중전의(宮中典醫)가 독약을 탄 식혜를 마신 이후 붕어했다.

이로써 1897년(광무 1) 10월 12일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로 즉위한 이후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던 고종황제가 천추(千秋)의 한(恨)을 남기고 향년(享年) 68세를 일기(一期)로 붕어하기에 이르렀다.

끝으로 20회에 걸쳐서 고종황제의 생애를 연재할 수 있었던 것을 보람있게 생각하며, 붕어한지 100주년을 맞이한 고종황제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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