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백제 무령왕이 반란군을 진압한 우두성은 한산이다(3)
[다시 쓰는 백제사] 백제 무령왕이 반란군을 진압한 우두성은 한산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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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건지산성 토루
건지산성 토루

백제 마지막 왕도 주류성설

건지산성은 백제 복국운동의 거점이었던 주류성(周留城)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이 학설은 역사학계의 태두였던 고 이병도 박사가 처음 제기한 바 있다. 주류성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두량이(豆良伊)’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쓰누(州柔)’로 표기돼 있다. 두솔성(豆率城)·주유성(州柔城)이란 기록도 전한다. 백제 왕도 부여가 함락될 즈음 풍왕(豐王)은 일본에 있었다. 풍왕은 백제의 제31대 의자왕과 어머니 군대부인 은고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본서기>에 보면 ‘풍왕은 631년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위해 아버지의 명령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의자왕이 1만여 백제인들과 함께 포로로 당나라에 끌려가자 유민들의 간절한 호소로 풍왕은 급거 귀국한다. 이때 일본 덴지천황은 5000명의 군사를 보내 백제부흥 운동을 원조했다.

초기 백제 복국군은 기세가 왕성했다. 잃어버린 백제성을 거의 회복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진압에 나선 신라군은 여러 전투에서 백제 복국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풍왕은 다시 백제를 일으켜 세우는 듯 싶었다. 그러나 풍왕과 복국군의 사실상 지휘부인 복신 사이에 알력이 발생했다. 풍왕은 군사들의 신망이 두터운 복신이 자신을 죽이고 왕위를 노린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결국 풍왕은 동굴로 복신을 끌어들여 포박하고 장수들을 시켜 참수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풍왕은 복신의 머리를 소금에 절여 군사들에게 경계의 표시로 전시했다.

복신을 잃은 복국군은 사기가 떨어졌으며 신라 김유신 장군과 손인사가 이끄는 당나라군과의 백촌강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 전투에는 수천 척의 일본 전함과 2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사들이 바다를 건너 참전까지 했지만 기상 변화로 참패하고 말았다. 이 주류성 패전으로 백제 복국군의 활동도 끝이 났으며 많은 유민들이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혹자들은 백제 마지막 수도를 주류성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백제의 복국의지는 완전히 꺾였다. <삼국사기>에는 주류성을 함락당한 풍왕이 고구려로 건너갔으며 가는 곳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일설에는 고구려의 멸망 이후 당나라로 연행되었으며 나중에는 남쪽 지방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백제의 마지막왕을 제31대 의자왕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일본서기>는 풍왕을 제32대 백제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안정복이 펴낸 <동사강목(東史綱目)>에도 복국 운동을 백제 역사의 연장으로 보고 풍왕을 백제 마지막 왕으로 보고 있다.

주류성에 대한 위치는 여러 설이 있다. 한산설, 홍성설, 연기설, 부안설, 청양설 등 이들 지역에서 아직까지 결정적인 금석문이나 사료가 찾아지지 않아 70년 논쟁거리로 남아있는 것이다. 고 이병도 박사는 백강에서의 백제·일본 연합군의 패전과 여러 상황을 미루어 한산 건지산성설을 주장하여 현재까지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지도 충청도 지도. (제공: 이재준 역사연구가)
여지도 충청도 지도. (제공: 이재준 역사연구가)

백제 잃은 한(恨) 노래로, 술로 달랜 유풍

“산유화야 산유화야 / 사비강 맑은물에

고기잡는 어옹들이 / 온갖고기 다잡아도

경칠랑은 낚지마소 / 강상풍월 좋을시고

헤헤헤 아하 헤헤 / 헤헤헤헤여로 상사듸요

산유화야 산유화야 / 이런일이 웬말이냐

용(龍)머리를 생각하면 / 구룡포(九龍浦)에 버렸으니

슬프구나 어화벗님 / 구국충성 못다했네….”

<산유화>는 충남 부여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모심기 민요다. 노랫말에는 백제 패망의 비애가 절절히 담겨 있다. 이 노래가 1000여 년의 시공을 넘어 지금도 우리에게 와 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 중 가장 문화가 뛰어났던 백제를 잃은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수도 사비의 장엄한 건물과 문화재들이 불타는 것을 본 백제인들의 슬픔이 아직도 생생히 전해진다.

백제의 후손들은 슬픔과 한을 노래 속에 숨기고 술을 담가 마시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오늘날 세계적 명주로 명성을 얻고 있는 한산 소곡주(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가 바로 백제 역사의 한을 알려준다. 한산 소곡주는 백제인의 손으로 빚어 낸 천년의 향을 간직한 술이다.

소곡주는 앉은뱅이 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옛날 어느 집 며느리가 술맛을 보느라고 젓가락으로 여러 번 찍어먹다가 자신도 모르게 취하여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은뱅이처럼 엉금엉금 기어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조선시대 때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한 선비가 서천 한산 지역을 지나다가 주막에 들렀다. 술을 시켜 한 잔 마셨는데 술맛이 너무 좋아 몇 잔 더 마신 뒤 일어서려고 했다. 그런데 일어서다 자빠졌다. 결국 일어서기를 포기하고 술을 더 마시고 말았다. 선비는 결국 과거시험장인 서울로 출발하지못했다고 한다.

소곡주(小麯酒)란 ‘누룩을 적게 사용하여 빚은술’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국주(小麴酒)’ ‘소곡주(素麯酒)’라고도 불리운다. 백제인 인번(仁番)이 일본에 가서 술 빚는 법을 가르쳤다는 일본 <고사기> 기록을 소곡주의 일본 전래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일본인들은 ‘국주(國酒)’로 지칭되는 사케의 원조가 바로 소곡주라고 보고 있다.

소곡주는 <동국세시기>를 비롯해 <요록> <규합총서> <규곤시의방> <임원경제지> 등 많은 문헌에 소개되고 있다. 양조방법은 먼저 수곡을 만들어 밀기울을 제거한 후, 흰무리를 지어 한데 섞어 밑술(술밑)을 빚고, 다시 고두밥을 지어 식기 전에 밑술과 고루 섞은 덧술을 발효시킨다. 술 빚는 시기에 대해서는 ‘음력 정월 첫 해일에 밑술을 담기 시작하여 3~4일 또는 덧술을 한 지 10일간 발효, 숙성시켜 채주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소곡주는 지난 2014년 벨기에 몽드 셀렉션에서 금상을 수상했으며 전국의 술 품평회에서 많은 상을 수상하고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한산에서는 매년 가을 ‘취하는 기쁨과 취하는 즐거움’이라는 주제로 소곡주 축제가 열린다.

완포리 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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