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백제 무령왕이 반란군을 진압한 우두성은 한산이다(2)
[다시 쓰는 백제사] 백제 무령왕이 반란군을 진압한 우두성은 한산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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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 내부(제공: 이재준 역사연구가)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 내부(제공: 이재준 역사연구가)

무령왕은 누구인가

지난 1971년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된 송산리 무령왕릉(사적 제13호)에서는 찬란한 백제 유물이 쏟아져 전 국민을 놀라게 했다. 백제 금속예술의 정화들이 1500년의 잠을 깨고 햇빛을 찾았다. 피장자의 지석(誌石)이 발견됨으로써 백제를 중흥시킨 무령왕과 왕비의 것으로 확인됐다.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斯摩, 斯麻) 또는 융(隆)이다. 동성왕(東城王)의 둘째 아들, 또는 개로왕(蓋鹵王)의 동생인 혼지(混支)·곤지(昆支)의 아들이거나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는 설이 있다.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는 무령왕이 키는 8척이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령왕은 가림성(加林城)의 반란을 진압한 후 고구려와 말갈과의 전쟁을 준비는 등 북방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문화가 발전한 중국 남조의 양(梁)과도 외교 관계를 강화해 512년과 521년 두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백제가 성왕대 찬란한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 시기 남조와 교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왕은 양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또 왜국과도 교류를 활발히 해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보내 백제의 발전된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왕은 즉위기간 중 국방에도 주력했다.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는 변방에 많은 성을 구축, 안보를 튼튼히 했다.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 등에게 명해 한북주(漢北州)의 15세 이상 장정을 동원, 쌍현성(雙峴城)을 쌓아 고구려의 남하를 경계했다. 특히 축성을 독려하기 위해 잃어버린 구 왕성인 한성을 순행하기도 하였다.

무령왕은 또 개혁적인 군주였다. 지배층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정책도 추진하였다.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궁성의 창고를 풀어 구제했다. 농사에 필요한 수리시설인 제방을 수축하는 한편, 무위도식하는 백성들을 색출, 귀농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

백제는 이 시기에 이미 호적편제 체계를 이루었음을 <삼국사기>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무령왕 9(509)년조를 보면 임나(任那) 지역에 도망가 호적이 끊긴 지 3~4세대가 지난 자를 찾아내 호적에 올리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토를 이탈한 백성을 조사하여 다시 백제로 옮겨 호적에 편입시켰다는 기사는 당시 호적편제가 잘 이뤄졌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임나지역의 호구조사(戶口調査)를 했다면 백제 영역 내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호적을 만드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무령왕은 23년 5월 7일 62세를 일기로 승하했으며, 2년 뒤인 525(성왕 3)년 8월 12일 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건지산성 정상에서 바라본 한산면. 멀리 금강하구도 보인다.
건지산성 정상에서 바라본 한산면. 멀리 금강하구도 보인다.

우두성 건지산성의 면모

건지산성(乾至山城)은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산조에 ‘흙으로 쌓았으며 주위가 3061척이다. 그 안에 7개의 우물과 1개의 못이 있으며 군창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라고 나온다. <여지도서>에는 ‘건지산성은 지금은 없어져 터만 남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건지산성은 둘레 1300m, 면적 16만 4128㎡로 내·외성을 갖춘 전형적인 백제식 판축성(版築城)이다. 주봉에는 타원형의 테뫼식 산성을 구축했으며 이 성을 중심으로 서북쪽의 작은 계곡을 두른 포곡형(包谷形)산성, 그리고 서문지의 남서쪽에 두 개의 소규모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포곡식 산성 형태는 본래 고구려 등 북방계의 축성방식이며 테메식은 전형적인 백제 축성방식이다. 두 개의 기능을 살린 건지산성은 다른 곳의 백제산성과 비교되며 매우 중요한 축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북편은 높은 천연 암벽을 성벽으로 삼았다. 나머지 부분은 토축을 보이고 있으나 대부분 할석과 흙을 다져 쌓은 판축형태로 나타난다. 높은 능선의 성벽 높이는 1m 내외이나 비교적 낮은 서문지 부근에서는 3m 높이다. 성 안에는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 있으며 지금도 한산(韓山)에서 산성에 이르는 도로는 이 문을 거치게 된다. 조사 자료를 보면 서쪽에서도 문지가 확인됐는데, 이 문지에 이르러 앞뒤로 서로 방향이 어긋나게 벌어지면서 개방되었다. 이것은 후대의 성곽에서 볼 수 있는 옹성(甕城)의 형태다.

한 자료를 보면 성안에 있는 봉서사(鳳棲寺) 서쪽 지점 약 200평가량의 계단형 평지에서 탄화미(炭化米)와 백제시대 토기조각이 함께 출토됐다는 보고가 있다. 현재 건지산성은 군 당국이 등산로를 따라 나무를 모두 베어 고식의 토루(土壘)를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토루 위에는 잡석과 흙을 다진 판축 상태가 정연하게 나타나 삼국사기 동성왕대 축성 기록임을 뒷받침한다. 이 시기 만들어진 선조문(線條紋) 와편과 연질(軟質) 토기편 등이 산란해 있다. 학계 일부에서 건지산성을 백제 후기 또는 통일신라대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본다.

건지산성. 돌과 흙을 다져 쌓은 판축형태를 보이고 있다.
건지산성. 돌과 흙을 다져 쌓은 판축형태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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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 2019-09-05 16:53:39
찬란했고 힘있던 백제가 일본의 식민지 국가였다는 일본의 망발은 어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