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백제 무령왕이 반란군을 진압한 우두성은 한산이다(1)
[다시 쓰는 백제사] 백제 무령왕이 반란군을 진압한 우두성은 한산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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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성흥산성을 찾은 시민들
성흥산성을 찾은 시민들

우두성 춘천설의 오해

우두성(牛頭城)은 백제를 중흥시킨 영주 무령왕(武寧王)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성이다. <삼국사기>에는 ‘동성왕(東城王) 8(486)년 백가(苩加)를 위사좌평(衛士佐平)으로 임명했으며 궁궐을 중수하고 우두성(牛頭城)을 쌓았다’고 기록돼있다. 우두성은 6세기 중반 매우 중요한 사건의 중심으로 등장한다. 성을 축성한 백제 동성왕이 시해를 당하자 아들 무령왕이 일본에서 급거 귀국, 진주하면서 반란군을 진압한 역사적인 자리다.

고(故) 이병도 박사는 우두성의 위치를 지금의 강원도 춘천으로 비정하였다. 춘천의 옛 지명이 우수주(牛首州)였음을 근거로 든 것이다. 그런데 백제 우두성을 춘천으로 비정한다면 위치상으로 안 맞는다. 당시 춘천은 고구려가 지배하는 영토로, 왜국에서 뱃길로 귀국한 무령왕이 춘천까지 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특히 반란군의 거점이 부여군 임천면의 가림성(加林城)임을 감안할 때 ‘우두성’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 소칭 건지산성(乾至山城)이 있다. 필자는 ‘한산’이란 명칭이 우두에서 비롯된 것이고, 건지라는 이름도 백제의 왕에 대한 호칭인 ‘건지, 견길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동국여지승람>에 ‘한산을 백제의 우두성’으로 비정한 기록(본래 백제의 우두성이 있었는데 신라 신문왕 6년에 마산현으로 되었다)이다. <대동지지> 한산군조에도 ‘백제 동성왕 8년에 우두성을 축성했는데 지금의 건지산 옛성(古城)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우두’란 무슨 뜻일까. 우리말로는 ‘소머리’ 혹은 ‘쇠머리’로 어문학자들은 ‘우두’를 고대 군장의 호칭인 간(干), 한(汗), 한(韓)과 같은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두성이 한산으로 변하고, 속칭 백제왕의 호칭을 딴 건지산성으로도 불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급거 귀국한 무령왕의 선단(船團)이 제일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서천 한산이다. 여기서 부여 임천 가림성까지는 한나절도 안 되는 거리. 무령왕이 귀국할 때까지 우두성은 백가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듯싶다. 무령왕은 공주에서 출전한 왕도군과 합세하여 백가를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가는 졸지에 동성왕을 시해했지만 왕도를 점령할 준비는 안됐던 것 같다. 무령왕은 반란군의 우두머리 백가를 참수하여 백강에 던졌다.

동성왕이 시해 된 곳으로 추정되는 완포리 한산면 완포리 강변
동성왕이 시해 된 곳으로 추정되는 완포리 한산면 완포리 강변

위사좌평 백가의 동성왕 시해

동성왕은 백제 제24대(재위 479~501) 왕으로 매우 호방한 임금이었다. 사냥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겼다. 한강 위례성을 잃고 웅진으로 천도 이후 국정이 안정되고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은 궁성 안에 호화로운 임류각(臨流閣)을 짓고 자주 신하들과 잔치를 벌여 음악 소리가 궁성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왕은 외교적으로 고구려의 남하를 방어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 신라왕에게 사신을 보내 사위가 되겠다고 했다. 이에 신라 소지왕은 왕족인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동성왕에게 시집보냈다. 백제와 신라는 연합하여 살수(薩水, 괴산 청천)까지 침공한 고구려 세력을 함께 격퇴하기도 했다.

동성왕은 추운 겨울에도 궁성을 나와 사냥을 즐겼다. 어느 해 겨울, 왕은 측근들을 데리고 지금의 소부리 인근까지 말을 달렸다. 그런데 날이 저물고 눈이 많이 내려 환궁하지 못하고 마포촌(馬浦村, 서천군 한산면 완포리 추정)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이것이 왕의 최후였다. 왕의 사냥에는 가림성(加林城) 성주 백가(苩加)가 따랐다. 백가는 위사좌평 출신으로 왕의 최측근이었으나 왕의 미움을 받아 가림성으로 좌천된 인물이었다. 백가는 왕이 잠든 틈을 타 부하를 시켜 시해했다.

왕이 시해되자 웅진성 신료들은 일본에 가 있던 무령왕에게 귀국을 요청했다. 무령왕은 군사들의 호위를 받고 바다를 건너가 반란군과 대치하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진주한 곳이 우두성이라고 기록돼 있다. 무령왕은 이곳에서 가림성에 있는 백가의 반란군을 격파한다.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에 있는 가림성은 속칭 성흥산성(聖興山城)이라고도 불린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24대 동성왕 23년(501)조에 ‘8월에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제시대에 쌓은 성곽 중에서 유일하게 축조 시기와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사적 제4호로 지정됐다. 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백제 전형의 테뫼식산성으로 남·서·북문지와 군창지, 우물터 등이 조사됐다.

글마루 탐방팀이 찾은 5월초, 성흥산성은 보수작업이 한창이었다. 성안에는 백제계 연질 와편과 토기편이 산란해 있었으며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와편도 다수 눈에 띄었다. 백제 동성왕대 축조되었으나 전시대를 거쳐 방어시설로 이용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건지산성 정상에서 바라본 한산면
건지산성 정상에서 바라본 한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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