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고종황제(高宗皇帝) 망명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중에 뜻밖의 돌발변수가 등장했으니 고종황제가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에서 식혜를 마신 이후 갑자기 복통을 일으켜 괴로워하다가 30분 만에 붕어(崩御)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고종황제가 붕어하기 이전에 이회영(李會榮)을 중심으로 고종황제 망명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망명계획과 병행하여 또 하나의 거사가 추진되고 있었으니 그것은 1918년 1월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깊은 관심을 보인 고종황제가 1907년(융희 1) 헤이그 특사 사건에 이어서 제2의 헤이그 특사 사건을 추진했으니 그것은 바로 파리강화회의 특사 사건이었다.

거슬러 올라가서 1907년 고종황제의 명(命)에 의해 극비리에 이상설(李相卨)을 비롯하여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참석하여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와 강대국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준은 현지(現地)에서 장렬히 순국(殉國)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의 여파로 일제는 고종황제에게 책임을 물어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황제(純宗皇帝)가 등극했다. 

이러한 헤이그 특사 사건이후 일제는 고종황제를 덕수궁에 사실상 유폐(幽閉) 생활을 하였으나 국권회복의 의지는 결코 굽히지 않았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황제는 제2의 헤이그 특사사건이라 할 수 있는 파리강화회의 특사 사건을 추진하게 됐다. 

이와 관련해 파리강화회의는 1차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4년에 걸친 전쟁이 종식되면서 당시 전승국 27개국이 패전국에 대한 처리문제와 궁극적으로 앞으로의 세계평화문제에 대하여 좀 더 심도 있는 의논을 하기 위해 1919년 1월에 파리에서 개최됐던 국제회의라고 할 수 있다.

고종황제로서는 파리강화회의가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전 세계 만방에 호소하고 또한 대한제국(大韓帝國) 독립(獨立)의 승인을 각국(各國)에 설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파리강화회의에 1907년(융희 1) 만국평화회의 경우와 같이 특사를 파견하기로 결심하였는데 그 대상자를 의친왕(義親王)을 포함해 의친왕의 웨슬리안 대학교 동문인 김란사(金蘭史)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파리강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될 예정이었던 의친왕과 김란사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본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