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의친왕(義親王)은 1906년(광무 10) 4월 7일 귀국 이후 4월 10일에 대한제국(大韓帝國) 육군부장(陸軍部長)에 임명됐으며, 이어서 4월 19일에는 참모관(參謀官)에 임명됐다.

아울러 7월 12일에는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字社) 제4대 총재로 임명됐는데 여기서 대한적십자가 설립된 배경을 살펴본다.

고종황제(高宗皇帝)가 1905년 7월 8일 적십자병원(赤十字病院)의 필요성을 조칙(詔勅)으로 내리고 병원설립을 진행시켜 10월 10일 대한국적십자병원(大韓國赤十字病院)이 개원(開院)하게 됐다.

이어 이를 대내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10월 27일에는 칙령 제47호로서 대한적십자사 규칙을 제정 반포하여 독립된 국가만이 가질 수 있는 국제적 기구인 적십자사가 이 땅에도 설립됐던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서 1392년(태조 1) 7월 17일 조선왕조(朝鮮王朝)가 개국(開國)한 이후 곤궁한 백성을 진료하기 위하여 설치됐던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 같은 구제기관의 업무를 승계한 대한적십자사는 그 규칙 제3조에서 “1863년 10월에 개설된 만국적십자회(萬國赤十字會)의 의결과 1864년 8월 제네바에서 체결한 조약의 근본취지를 따른다”고 규정함으로써 자주독립국 적십자사의 명분과 위상을 세계 각국에 알렸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의친왕이 이러한 대한적십자사의 총재로 임명되었다는 것은 그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3년후인 1909년(융희 3) 10월 경남 거창군 소재 위천의 전(前) 승지(承旨) 정태균(鄭泰均)을 방문해 1개월 동안 머물면서 그 지방의 뜻있는 우국청년들과 접촉했으며, 북상의 사선대(四仙臺) 일대를 장차 의병의 근거지로 삼을 생각으로 일부 땅을 매입했으나 일제에 의하여 발각이 되어 서울로 귀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관련해 거창 사건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으나 의친왕의 항일운동(抗日運動)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거창 사건이 발생한 이듬해에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國權)을 잃게 되는 통탄스런 일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의친왕은 경술국치(庚戌國恥)가 발생한 이후 5년이 지난 1915년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에서 고종황제를 당수(黨首)로 추대하고 베이징(北京)으로 망명시키려고 할 때도 연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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