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의친왕(義親王)은 고종(高宗)의 5남으로서 1877년(고종 14)에 출생하여 1955년 8월 16일에향년(享年) 79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다.

필자가 의친왕의 행적에 있어서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항일운동(抗日運動)과 관련된 대목인데 우선 그의 어린 시절을 살펴본다.

의친왕의 생모(生母) 장귀인(張貴人)은 원래 명성왕후(明成王后)를 보필하는 상궁(尙宮)이었는데 고종의 승은(承恩)을 입어서 의친왕을 출산했는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명성왕후의 견제로 인하여 궁궐에서 쫓겨나 의친왕은 외가에서 외삼촌으로부터 학문과 서예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장귀인도 명성왕후가 내린 벌의 후유증으로 임종했으니 의친왕에게 심적인 타격이 컸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성왕후는 왕세자(王世子)의 후사(後嗣)를 염려하여 1891년(고종 28) 외가에 있던 의친왕을 궁궐로 불러서 관례(冠禮)를 시키고 의화군(義和君)으로 봉(封)했다.

이어서 의친왕이 17세가 되는 1893년(고종 30) 연안김씨(延安金氏) 가문(家門)으로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친청 아버지 김제남(金悌남)의 10대손인 김사준(金思濬)의 딸 김덕수(金德修)와 길례(吉禮)를 올렸다.

의친왕은 1894년(고종 31) 9월 보빙대사(報聘大使)의 자격으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그로부터 1년후에 한 나라의 국모(國母)가 시해(弑害)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당시 조정(朝廷)은 극도의 혼란속에 빠지게 됐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극도의 신변의 불안을 느낀 고종이 을미시해(乙未弑害) 이듬해인 1896년(건양 1)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을 지밀에서 보필하고 있던 엄상궁(嚴尙宮)이 승은을 입게 되어 왕자가 출생하니 이가 곧 영친왕(英親王)이다.

한편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고 있던 고종도 조정의 중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서 그 이듬해인 1897년(광무 1) 환궁하면서 현재 조선호텔 자리인 원구단(圓丘壇)에서 하늘에 천제(天際)를 올리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였으니 때는 10월 12일이었다.

의친왕은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2년후인 1899년(광무 3)에 미국으로 유학가게 됐으며, 1900년(광무 4)에 의화군에서 의친왕으로 진봉(進封)했다.

의친왕은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시에 있는 웨슬리안 대학과 버지니아주에 있는 로마노크 대학에서 5년여에 걸친 유학생활을 통해 서구문물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었으며, 유학생활을 마치고 동경(東京)에 8개월을 체류한 이후 마침내 1906년(광무 10) 4월 7일에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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