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915년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사건이 발생한지 3년후인 1918년 이회영(李會榮)을 중심으로 고종황제(高宗皇帝) 망명계획이 추진됐다.

고종황제가 해외로 망명해 한일병합(韓日倂合)의 부당성과 강제성을 직접 호소한다면 그 폭발력이란 가히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한 나라의 황제가 독립의 정당성을 직접 피력하고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선다면 각처에 산재한 독립운동 세력의 일치단결은 물론 국내외의 동시다발적인 무장봉기도 가능해진다.

특히 일본세력에 기대어 현실에 안주하던 친일파나 기득권 관료들도 명분을 잃게 되고 양반들의 농민에 대한 지배력도 급속히 와해돼 식민통치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게 뻔했는데 이회영이 고종황제 망명계획을 추진한 것은 이런 정치적 폭발성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회영은 그 시기를 엿보던 중 드디어 방안을 강구했으니 아들 이규학(李圭鶴)의 신부례(新婦禮)를 이용하기로 했는데 이규학은 1917년 이회영을 찾아 어머니 이은숙(李恩淑)과 함께 국내로 귀국한 상태였으며, 조대비(趙大妃)의 친척이면서 고종황제의 조카인 조계진(趙季珍)과 혼인하기로 돼 있었다.

이와 관련해 신부례 의식은 비록 망국대부(亡國大夫)라 해도 궁궐의 의식을 가미했으므로 수일 전부터 그 절차가 번잡 다양하여 축제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혼수를 다 궁내에서 준비하여 궁내 나인이 신랑 집으로 폐백 전일에 다 가져올 정도로 신부례는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진행됐다.

그런데 1918년 11월에 신부례를 거행한 이유가 바로 이를 구실로 궁궐에 출입하면서 고종황제의 망명계획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망명계획에는 이회영,이시영(李始榮) 형제(兄弟)를 비롯하여 이득년(李得年),홍증식(洪增植),민영달(閔泳達),조완구(趙琬九) 등이 가감했는데 이회영이 고종황제의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망명의사를 타진하자 고종황제는 그 계획을 승낙했다.

당시 일제는 영친왕(英親王)을 일본의 왕족 이방자(李方子)와 혼인시키려 했으나 고종황제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태자(皇太子)가 일본 왕족과 혼인한다는 점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고종황제는 이회영의 제안을 승낙하기에 이르렀는데 민영달은 고종황제가 망명계획에 찬성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 이후 5만원의 자금을 지원했다.

이회영은 1918년 말 무렵 이득년과 홍증식을 통해 민영달이 지원한 자금을 베이징(북경(北京))에 체류하고 있던 이시영에게 전달해 고종황제가 거처할 행궁(行宮)을 알아보라고 부탁까지 하면서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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