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태 세계한국어교육자협회(WATK) 수석부회장, 한글세계화운동총본부 뉴질랜드 본부장

 

세계 최고봉이라 불리는 에베레스트산(Mount Everest)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7.26
세계 최고봉이라 불리는 에베레스트산(Mount Everest)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7.26

세계 최고봉이라 불리는 에베레스트산(Mount Everest). 높이가 무려 해발 8848m에 달한다. 1802년부터 영국은 히말라야에 대한 측량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1830년부터는 영국의 포병장교이자 측량기술자인 ‘조지 에베레스트’(George Everest, 1790~1866)를 총괄 책임자로 임명하여 진행했다. 그 결과 1847년 히말라야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다는 사실이 보고됐으며, 1853년에 확인됐다. 가장 높은 산은 측량된 8000m 이상의 14개의 봉우리 가운데 ‘피크 15(Peak XV)’라고 표시된 봉이었다. 1865년부터는 세계 최고봉 ‘피크 15’를 명명하는 데 있어서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따기로 했다. 계측 당시의 총괄 책임자였으므로 ‘에베레스트’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에베레스트산은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일뿐만 아니라 험하기로도 유명하다. 그럼에도 세계의 수많은 산악인이 등정에 도전해 왔으며 등정에 성공하기를 원한다. 험준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하는 것은 첨단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물리적·과학적 등반 기술에 익숙해지기 위해 실효성 있는 등반 계획,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 것은 기본이다. 우리나라도 세계에서 8번째로 1977년 9월 16일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적이 있다. 당시 이를 본 국민은 열광했다.

그렇다면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한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언제, 누구였을까? 놀랍게도 주인공은 나라 전체 인구가 500만 명도 채 안 되는 남반구의 작은 나라 뉴질랜드에 있었다. 뉴질랜드 최고의 산악인이자 탐험가인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 1919. 7. 20~2008. 1. 11)’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1936년부터 양봉사업에 손을 대 사세를 넓혀갔다. 그러던 그가 등산가로의 길을 걷게 된 데는 1947년에 해리 에어스(Harry Ayres)라는 뉴질랜드 등산가를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본격적으로 등산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1948년 1월 30일, 뉴질랜드에서 가장 높은 산인 쿡산(Mt. Cook, 3724m)의 최고봉에 오르는 기적을 창출한다.
 

뉴질랜드 5달러짜리 지폐에 등장한 애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7.26
뉴질랜드 5달러짜리 지폐에 등장한 애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7.26

뉴질랜드에 앞서 일찍부터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에 가장 공을 들인 국가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1922년부터 1953년 힐러리가 정상을 정복하기까지 무려 8차례나 원정에 나섰다. 하지만 빈번히 실패했다. 영국은 1953년에 에베레스트 9차 원정대를 편성한다. 이때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를 초청하는데, 그는 2차 공격조에 편성됐고 셰르파(Sherpa)로 네팔인 텐징 노르게이(Tenzing Norgay, 1914~1986)가 선정됐다. 그야말로 영국등반대의 일원으로 참가했을 뿐이었다. 1차 공격조에 속하지 않은 이유는 영국인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1953년 5월 29일 아침. 에드먼드 힐러리는 마지막 등정을 시도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전날 밤에 신발을 텐트 바깥에 놔 둔 게 화근이었다. 얼어버린 것이다. 대체할 신발이 하나도 없어 신발을 녹이는 데만 무려 2시간을 보냈다. 이후 14㎏ 배낭을 짊어지고 힐러리는 텐징과 함께 등정에 나섰다. 깎아지는 바위만 통과하면 정상에 도달한다. 그들은 마침내 12m 바위면을 통과하여 정상에 오른다. 훗날 이 바위면을 ‘힐러리 계단’으로 부르게 되었다. 오전 11시 30분! 드디어 인류가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최고봉을 밟는 순간이었다. 힐러리는 세계적 등산가로서 옥좌(玉座)를 차지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정상에 오른 이날이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전날이었다. 인류가 1921년부터 에베레스트산에 도전해 온 이래, 도전 31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세계인들은 탄성과 환호를 질렀다. 세계는 힐러리와 그의 조국 뉴질랜드에 경이로운 시선을 보냈다. 힐러리와 텐징이 에베레스트산 정상을 밟는 순간, 텐징은 “드디어 꿈이 이루어졌다!”라고 말했다. 깎아지는 빙벽, 급변하는 기후, 눈사태, 아이스폴과 빙하 등 곳곳에 도사린 수많은 함정과 위기도 끊임없는 인간의 도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상을 정복하기까지 여러 해에 걸쳐 많은 준비를 해 왔지만, 막상 정상에 서서는 약 15분 정도만 머물렀다. 그의 등반 열정은 이후에도 지속됐다. 1958년에는 차로 남극을 최초로 횡단했으며, 1965년까지 히말라야산맥의 열 곳의 봉우리 등정을 성공리에 마쳤다.

에드먼드 힐러리는 그 전에 여러 번에 걸쳐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도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실패만 거듭했다. 그러던 그가 1940년대 초 에베레스트산 등정 도전에 실패한 후 남긴 명언이 있다. “에베레스트산아, 너는 나를 계속 좌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정복할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성장이 없겠지만 나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힘도 능력도 기를 것이다. 내가 준비하는 장비도 더 좋아질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오겠다. 기다려라. 다시 도전하여 반드시 정상에 설 것이다.” 그는 또 “꿈을 가진 사람은 비록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않는다”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늘 희망과 용기를 가졌다.
 

에베레스트산 정상에서 바라본 동쪽의 장엄한 광경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7.26
에베레스트산 정상에서 바라본 동쪽의 장엄한 광경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7.26

에베레스트 등반 40주년이 되는 1993년에 힐러리는 새로운 대기록을 남긴다. 그의 아들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의 도전정신에 신(神)조차 감동한 것이다. 뉴질랜드에서 에드먼드 힐러리와 같은 세계적인 산악인이 배출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뉴질랜드인들은 등산하고 탐험을 하는 데 익숙하다. 대중화돼 있다. 이 때문에 난이도별 장·단거리 등산 트랙(Track)이 잘 발달돼 있다.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힐러리는 모금 운동을 전개해 헌신적으로 네팔의 교육과 의료 발전에 기여했다. 산악비행장, 학교, 병원, 보건소를 설립하는 데 역점을 두고 추진했다.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 네팔 정부는 에베레스트산 근처에 있던 공항의 이름을 ‘텐징-힐러리 공항’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에베레스트를 세계 최초로 등반한 네팔인 셰르파 ‘텐징’과 뉴질랜드 등반가 ‘에드먼드 힐러리’의 이름을 딴 공항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들은 네팔과 뉴질랜드의 영웅이었다.

뉴질랜드 정부도 힐러리의 뛰어난 업적과 활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시키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를 통해 뉴질랜드의 인물, 역사와 문화를 상징적으로 반영하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고안해 낸 방법이 화폐에 등장시키는 방법이었다. 이로 인해 그의 초상이 뉴질랜드 5달러짜리 지폐 앞면에 등장하고 있다. 5달러짜리 지폐에는 에드먼드 힐러리 그림과 함께 하얀 눈 덮인 산이 그려져 있다.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산으로 최고봉인 쿡산이다. 산의 이름을 ‘쿡’으로 지은 것은 뉴질랜드를 탐험한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2015년 국제은행권협회(IBNS)에서는 뉴질랜드의 5달러짜리 지폐를 ‘2015년의 은행권’으로 선정했다. 지폐가 국제적 인정을 받은 만큼 에드먼드 힐러리의 인지도는 국제적으로 더욱 높아졌다. 힐러리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을 올랐지만, 그의 마음은 가장 낮은 자세로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는 ‘뉴질랜드 유명인사 50명’에 대한 신뢰도 조사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20세기의 탐험가 중 가장 위대한 에드먼드 힐러리야말로 진정한 뉴질랜드의 영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