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박사의 역사이야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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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촬영(1921. 1. 1) ⓒ천지일보 2019.6.21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촬영(1921. 1. 1) ⓒ천지일보 2019.6.21

올해는 3.1운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의 해이다. 3월 1일 3.1절 100주년 행사와 함께 4월 11일 임시정부 100주년 축하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렇게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올해 국민들이 많이 듣고 알게 되었지만, 임시정부를 탄생시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대해 아는 국민들이 많지 않을 것 같다.

세계 약소민족 독립운동에서 망명정부, 임시정부 등 정부를 세워 독립투쟁을 한 경우는 적지 않게 볼 수 있지만, 국회격인 임시의정원을 세워 자국 영역 밖에서 국가 기능을 수행한 경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우가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

1919년 3월의 3.1운동의 대폭발은 잠들어 있었던 한민족의 독립에의 꿈을 흔들어 깨웠다. 많은 인사들이 독립의 꿈을 안고 국제자유항인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상하이는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법적 지배를 받지 않는 외국 조계가 형성되어 누구든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1919년 4월 10일 밤 10시 상하이 프랑스조계 김신부로의 한 2층 집에 김대지· 김동삼·김철·남형우·백남칠·손정도·조소앙·선우혁·신석우·신익희·신채호·신철·여운형·여운홍·이광·이광수·이동녕·이시영·이영근·이회영·조동진·조동호·조성환·조완구·진희창·최근우·한진교·현순·현장운. 상하이의 한인 가운데 29명이 모였다. 그들은 그 모임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으로 결정하고 이동녕을 의장으로, 손정도 목사를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그리하여 국회격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제1회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소박한 모임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과 민주공화정의 정치체제. 자유와 평등의 국민 기본권 같은 국가적 골격이 이 회의에서 거의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29명의 의원들은 나라 이름에 대한 토론을 했다. 신석우의 동의와 이영근의 재청으로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결정됐다. 9년 전 대한제국은 국민의 참정 욕구를 누르고 ‘영원한 황제의 나라’를 추구하다가 일본에 의해 망했다. 국민들은 “황제가 잃어버린 국권은 곧 국민의 것이며, 대한제국의 멸망은 곧 국민주권의 새로운 공화국 출발”로 여겼다. 그리하여 수많은 ‘보통사람들’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의병항쟁과 애국계몽운동,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목숨을 바쳤다. 그러한 의식과 과정이 결집되어 1919년 3월의 대대적인 3.1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에는 그러한 국민주권 의식과 공화정 추구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었다.

임시의정원의 29인의 의원들은 역사상 최초의 헌법 격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의 심의와 의결에 들어갔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이시영·조소앙·신익희·남현우 등 4인 위원회가 기초 작업을 해 놓았다. 전체회의에서는 임시 헌장안에 병역의 의무를 추가했다. 항목 중에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8조를 놓고 논란이 빚어졌다. 찬성론자는 “고종이 승하할 때 수많은 군중이 대한문 앞에서 통곡했다”며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황실 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대론자는 ‘망국의 책임’을 말했다. 여운형은 “망국의 울음은 아무 때나 울면 잡혀갈 처지였기 때문에 참고 있다가 핑계 김에 기회를 얻어 운 것”이라며 “황실 그 자체를 생각한 울음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황실 우대론자를 꺾진 못해 문구 일부를 수정하는 선에서 가결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헌장(1919. 4. 11) ⓒ천지일보 2019.6.21
대한민국 임시정부헌장(1919. 4. 11) ⓒ천지일보 2019.6.21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한다”는 선포문과 함께 모두 10개조로 구성되었다.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하여, 국체(國體)와 정체(政體)를 민주공화제로 밝혔다. 국민주권의 민주공화정을 여는 새로운 도약과 혁명적 전환을 명시한 조항이었다.

제2조에서는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함”이라고 하여 대의제(代議制)를 규정하였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행정부(임시정부)와 의회(임시의정원)를 구별하고, 인민의 자유(언론·출판·집회 등), 권리(선거권·피선거권 등), 의무(교육·납세·병역) 등을 규정하였다. 이로써 임시헌장은 간략하지만 새로운 공화국에 필요한 요소를 거의 다 담고 있으며, 민주주의 원리에 기초한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태어났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한다.

나. 정체는 민주공화정으로 한다.

다. 대한민국의 통치는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수행한다.

라. 대한민국 국민은 남녀, 귀천, 빈부의 계급이 없이 평등하다.

마. 대한민국 국민은 신앙,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거주이전 및 신체 등 일체의 자유를 누린다.

바. 대한민국 국민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고,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를 진다.

사. 대한민국은 건국정신을 세계에 발휘하여 인류문화와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아. 그 밖에 구황실을 우대하고, 국토회복 후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하도록 규정하여 해방 후 정부수립까지 염두에 두었으며, 정부가 수립될 때 의정원을 국회로 바꿀 것임을 명시하였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은 조소앙이 기초하였고, 조소앙·신익희·이광수 3인 심사위원의 심사를 거쳤으며, 본회의에서 제6조와 제8조의 일부만을 수정하고 그대로 통과시켰다.

그 다음으로 제1회 임시의정원 의원들은 정부의 관제(官制, 조직)를 정하고 국무원을 선출하는 정부 수립 절차에 들어갔다. 국내의 한성정부는 수반이 ‘집정관총재’로 되어 있었는데, 국무총리로 바뀌었다. 법무부와 군무부를 새로 만들었다. 국무원은 29명이 선거로 뽑았다. 신석우가 서울에서 조직한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인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자고 동의하고 조완구가 재청했다. 한성정부는 서울에서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를 거쳐 조직되었고, 연합통신(UP)에 보도되어 가장 정통성이 있는 임시정부로 여겨졌기 때문에 상해 임시정부 논의에서 한성정부의 조직구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정통성을 확보, 강화하고자 하였다.

신채호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문제를 거론하며 반대했다. 의견이 분분하자 선거를 하기로 했다. 국무총리로 추천된 이승만이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요구안을 우드로 토마스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위임통치 청원문제는 정부수반 결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승만 외 3명을 더 추천받아 4명을 놓고 표결에 붙이기로 했다. 출석자 3분의 2의 찬성이 나와야 후보자에 올릴 수 있었다. 박영효·박용만·이상재·신채호·안창호·이동녕·조성환·김규식·이회영이 천거됐지만 후보자로 올릴 수 있게 된 인물은 안창호와 이동녕뿐이었다. 현창훈이 ‘이승만 국무총리’를 거부한 신채호를 국무총리에 추천하자 폭소가 터졌다. 신채호는 화를 내며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한성에서 온 임시정부 명단에 국무총리 총재로 지목됐던 이동휘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결국 이승만·안창호·이동녕 3인을 놓고 무기명 단기식 투표로 진행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인 초대 국무총리로 이승만이 선출됐다.

이어 각 부서 장관에 해당하는 총장들을 선출했다. 내무(안창호)·외무(김규식)·교통(문창범) 총장 선출안은 동의와 재청으로 가결됐다. 재무·군무·법무 총장은 각각 3명씩 후보를 천거한 후 선거를 거쳐 최재형, 이동휘, 이시영을 뽑았다. 총장 이래 차관에 해당하는 차장 선거에서는 재무차장 이춘숙만 동의와 재청으로 선임했다. 내무(신익희)·외무(현순)·교통(선우혁)·군무(조성환)·법무(남형우) 차장은 상해에 있는 사람 가운데 두 배 수를 추천해 투표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회의는 밤을 새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했다. 이승만, 안창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내각 인사들이 미국 연해주 북경 등지에 흩어져 있어 취임식이나 정부수립 선포식을 할 수는 없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임시정부 출범의 역사적 소임을 하고 4월 11일 오전 10시에 폐회됐다.
 

임시정부 통합을 이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1919. 9. 17). 앞줄 중앙에 안창호, 다음 줄 맨 오른쪽이 김구 ⓒ천지일보 2019.6.21
임시정부 통합을 이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1919. 9. 17). 앞줄 중앙에 안창호, 다음 줄 맨 오른쪽이 김구 ⓒ천지일보 2019.6.21

통합임시정부의 출범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임시정부들이 조직·선포되었다. 그러나 ‘정부’로서 조직주체와 성립과정이 분명하지 않은 문서상의 정부들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실체가 분명한 것으로 연해주의 대한인국민회와 국내의 한성정부 그리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었다. 실체가 확인되는 세 임시정부 중에서도 내각과 의회를 갖춘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뿐이었다.

1919년 5월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상해에 도착하여 6월 28일 내무총장에 취임했다. 제1회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던 이동녕은 이승만 국무총리가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임시국무총리로 선임되어 사직하고, 부의장 손정도 목사가 임시의정원 의장을 맡고 있었는데, 안창호는 손정도 의장과 함께 임시정부의 통합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9월 7일 열린 임시의정원 제6회 회의(1919. 9. 7~11)에서 연해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와 국내의 한성임시정부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하는 결의를 하고 임시정부 수반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임시헌법을 제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제도시 상하이에 민족 전체의 대표성을 가진 통합임시정부로 발전하였다. 또한 상해의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근현대 역사에서 매우 귀한 타협과 통합의 역사와 정신을 보여 주었다.

이후 분열과 약화의 기간, 윤봉길 의거 이후 8년간의 피난과 고난의 이동시기를 겪기는 하였으나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등 일제의 침략전선 확대에 대응하여 임시의정원은 좌·우파의 독립운동 세력이 연합하여 통일적 대일 항전 진용을 결성하고, 자유세계와 연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위한 혈전을 전개하여 통합과 통일,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연대의 역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역사에 나타난 협치와 통합, 통일, 국제연대의 정신은 점점 복잡화, 다양화, 다문화해 가는 우리 사회의 통합과 남북통일의 민족적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기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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