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영덕-영해 시위 양상 다르게 표출
전국 약 1700건의 만세시위운동
3.1운동 100주년 의미 되새겨야

영해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천지일보 2019.5.16
영해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천지일보 2019.5.16

영덕군은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 때 영해군을 흡수했다. 영덕과 영해는 서로 사회적․문화적 배경이 달랐다. 두 지역은 같은 주체에 의해 같은 날 만세시위를 벌였는데도 지역사회의 배경 차이가 시위 양상을 다르게 표출시켰다.

지품면의 예비 신학생 김세영
영덕군 남부 지품면 낙평동의 김세영(金世榮, 30세)은 예수교 북장로파 교회 조사(助事)로서 평양신학교로 유학 가는 도중 경성에서 3.1운동을 맞았다. 김세영은 평양행을 단념하고 3월 3일 고종 국장에 참예한 후 다음날로 지품면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3월 12일 김세영은 같은 동리의 친분이 두터운 권태원(權泰源, 29세, 농업)의 찬성을 구하고, 권태원을 영해지역 정규하에게, 김혁동(金赫東)을 영덕읍 강우근(姜佑根)·김우일(金愚一)에게, 김중명(金重命)을 원전동의 김태을(金太乙), 황장동의 주명우(朱明宇)에게 보냈다. 다음날 경찰이 들이닥쳐 김세영은 1주간 예비검속되었다. 이에 권태원이 전면에 나서 영덕 군청 소재지에서 일대 시위를 계획하여 주도하게 되었다.

권태원은 영덕면 금호동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강우근(姜佑根)을 찾아가 영덕읍내 만세시위를 부탁하였다. 두 사람은 3월 18일 영덕읍 시장 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영덕장터 근경 ⓒ천지일보 2019.5.16
영덕장터 근경 ⓒ천지일보 2019.5.16

3월 18일 남부 영덕읍내 시위
영덕면 금주동의 강우근(姜佑根, 40세, 농업)은 예수교회의 조사로서 교회 신도에게 3월 18일 영덕읍내 시위운동 참여를 권유했다. 이리하여 금호동 예수교 장로교회에 속하는 영덕면 화개동·금호동, 남정면 남정동, 석보면 포산동 등지의 기독교인 50여명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품에 품고 3월 18일 영덕읍 시장으로 잠입하였다. 오후 2시 반 장꾼이 가장 많이 모였을 때 강우근은 장 복판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다. 장꾼이 일제히 호응하여 만세 함성은 시장을 진동케 하고 군중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만세시위 소식을 듣고 일본 군경들이 출동하여 주동 인물 강우근을 비롯하여 20명의 군중을 검거하고 나머지 군중들을 총검으로 위협하여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영덕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졸업생들이 주민들과 합세하여 영덕경찰서를 습격하고 구속 중인 애국인사들을 구출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본 군경은 일본인 재향군인과 소방조합원 60여명을 긴급 소집하고, 강구(江口)에 급사를 급히 보내어 입항 중인 일인 어부 60여명의 응원을 요청하여 삼엄한 경계를 폈다. 이로 말미암아 더 이상의 만세시위는 일어나지 못했다.

3월 19일 남부 지품면 시위
지품면 원전동 예수교 장로교회의 영수(領袖) 주명우(朱明宇)는 김세영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동리 교인 수십 명을 규합했다. 3월 19일 오전 11시 30분경 동내(洞內) 장날을 이용하여 ‘대한 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들과 더불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이곳 주재소로 몰려갔다. 주명우는 주재소 앞에 집결한 군중 앞에서 열띤 어조로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때 총검을 들고 나타난 일경에 의해 그는 검거되고 군중은 강제 해산을 당하고 말았다.

4월 4일 오후 1시 30분 남정면 장사동의 기독교도 및 청년유지 17명이 그곳 장날을 이용하여 태극기를 높이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장으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남부의 영덕 지역 만세시위는 대체로 이와 같이 끝났다.
 

갈암종택(영덕군 창수면 인량6길 12-23, 도지정 문화재) ⓒ천지일보 2019.5.16
갈암종택(영덕군 창수면 인량6길 12-23, 도지정 문화재) ⓒ천지일보 2019.5.16

3월 18일 북부 영해면 시위
영덕군 북부 구 영해군 지역 영해면·창수면·병곡면은 권(權)·남(南)·박(朴)·이(李)·백(白)의 5대 성(姓)의 영향력이 큰 지역이었다.

권태원은 3월 15일 병곡면 송천동 예수교 장로교회 정규하(丁奎河), 남효직(南孝直), 영해면 괴정동 사는 남녀명(南汝明, 일명 世爀)을 만나 김세영의 이야기를 상세히 전하고 거사를 의논하였다. 이들 모두 적극 찬성하여 함께 동지를 규합해 갔다. 정규하는 다음날인 주일 송천동 교회로 가 90여명의 교인들에게 권태원의 이야기를 전하여 호응을 얻었다. 또한 창수면 인량동 명망가 권상호(權相鎬), 송천동 박의락(朴義洛)의 호응도 얻었다. 이리하여 권태원·정규하·남효직·남여명·권상호·박의락 등은 지휘부를 결성하고 거사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해갔다. 이때 정규하는 시위장소로서 영덕보다 영해시장이 좋겠다는 제의를 했다. 이에 거사는 3월 18일 영해 성내동시장으로 정하여, 영덕과 영해가 따로 남부와 북부 동시 시위를 전개하게 되었다.

이들은 각자 책임을 분담하여 영해면·병곡면·축산명(丑山面)·창수면 내의 기독교 교인과 기타 농민들을 광범하게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준비를 서둘렀다. 특히 이들은 대중동원에 있어서 토착 향반인 군내의 권·남·박·백·이 등 5성(姓)의 참여가 중요하다고 보고 유지들의 호응을 설득했다. 그 결과 권영조(權永祚)·남교문(南敎文) 등을 비롯하여 이상화(李祥和)·김원발(金源發)·서삼민(徐三民)·조영한(趙榮漢)·손영세(孫永世) 등 많은 유지들이 호응하게 되어 이들이 문중의 영향력을 활용하였다. 또한 시위계획에 영해면 송천동 구장 권정필(權正弼), 병곡면 각리(角里) 구장 남호정(南浩定), 병곡면 원황동의 구장 권상식(權相植), 창수면 창수동 구장 이수각(李壽珏), 창수면 신리동 잡화상·구장 이현설(李鉉卨) 등 구장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3월 18일 영해읍내 성내리 시장 장날이 되었다. 정규하는 정오 조금 지나 준비한 대(大)·중(中)의 태극기 각 1개씩과 소(小) 태극기 약 40개를 가지고 시장으로 잠입하였다. 시장에는 약 3천 명의 장꾼이 모였다. 오후 1시경 정규하·박의락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은 호응하여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였다. 정규하는 보통학교 훈도와 학생들을 참여시켜 그들을 데리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 경찰들도 군중의 요구에 만세를 불렀다. 군중들은 다시 시장을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다시 주재소로 몰려들었다.

이때 영해주재소 일인 경찰부장이 나타나 해산을 명령하며, 큰 태극기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노한 군중들은 곤봉과 돌을 들고 주재소를 부수고 일인 경찰부장 모자와 대검(帶劒)도 빼앗았다. 주재소의 유리창과 책상, 의자 등은 파괴되고 장부·서류 등도 모두 파기되었다. 일인 순사부장은 몰매를 맞아 중상을 입었고, 제복 윗도리는 갈기갈기 찢어졌다.

군중들은 다시 공립보통학교 몰려가 애국심 없는 교원들을 성토하고 건물과 기구를 파괴하였다. 군중들은 다시 일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부른 후 파괴하였다.

정규하는 주재소 옆 단상에 올라 독립 연설을 하고 찬송가를 부른 후 군중과 함께 주재소 벽을 완전히 파괴하고 일인 경찰부장의 사택도 파괴해 버렸다. 그 후 군중들은 부근 음식점으로 들어가 얼마동안 휴식한 후 재차 시장에 집합하였다. 정규하는 단 위에 올라 다시 독립연설을 한 후 찬송가를 불렀다. 군중들은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 이곳에 걸려 있는 경찰복을 전부 찢어 버리고 비치되어 있던 대검(帶劒)과 총기 4정 및 탄약 87발을 압수하여 파기해 버렸다.

영덕경찰서로부터 일인 서장 이하 4명의 경찰이 달려 왔다. 이들은 고압적으로 해산을 명했다. 군중들은 격분하여 이들을 포위하고 총기와 대검을 빼앗은 후 제복을 낫으로 갈기갈기 찢고 곤봉과 주먹세례를 가했다. 이들이 기진해 버리자 군중들은 이들을 일인이 경영하는 수본(水本)여관에 감금하였다. 이날 밤 군중들은 영해 읍내를 완전히 장악하고 밤새 독립만세를 부르며 해방의 기쁨을 느끼며 시내를 누비면서 시위하였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병곡면 송천교회(1910년 설립, 국가지정 문화재 제288호) ⓒ천지일보 2019.5.16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병곡면 송천교회(1910년 설립, 국가지정 문화재 제288호) ⓒ천지일보 2019.5.16

3월 18일 병곡면 시위
영해 시위대 일부는 병곡주재소가 있는 병곡면 병곡동으로 행진해 갔다. 이들은 연도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병곡경찰관주재소 및 병곡면사무소 앞에서 한국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정규하 등의 지휘에 따라 시위대는 주재소 및 면사무소로 쇄도했다. 주재소는 지붕과 기둥만 남고, 공문서 등 훼기하였다. 면사무소도 창유리, 탁자 등 비품이 파괴되고 납세고지서 원부·기타 공문서를 훼기하였다.

3월 19일 영해 성내시장 시위 계속
전날에 이어 3월 19일도 아침부터 성내시장 만세시위는 계속되었다. 군중은 수천 명으로 불었다. 오전 11시경 포항 헌병 분대장이 6명의 헌병을 거느리고 달려와 군중에게 해산을 명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이를 거부하고 만세시위를 그대로 계속하였다. 일군 헌병들도 손을 대지 못하였다.

3월 19일 창수면 시위
창수면 창수동에서는 구장 이수각(李壽珏) 등의 발의로 영해면 성내 시장보다 창수면에서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19일 주민 200여명이 창수면 창수동에 있는 창수경찰관주재소 부근에 모여 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며 기세를 올렸다. 구장 이수각 등이 지시하자 군중이 주재소 사무실 객방 및 주임순사의 숙사의 벽·천정 기타를 파괴하고, 공문서를 훼기하였으며, 주임순사 다카키 이사오(高木伊三郞)가 숨겨놓은 물품 서적 등을 파괴하였다.
 

영덕 시위를 주도한 김세영 지사의 태극기 ⓒ천지일보 2019.5.16
영덕 시위를 주도한 김세영 지사의 태극기 ⓒ천지일보 2019.5.16

탄압
3월 19일 오후 5시 대구에서 출동한 보병 80연대 장교 이하 17명이 군중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임창목(林昌穆)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6명이 부상을 입었다. 김세영·권태원·정규하 등 도합 17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중 주도자 권상호․정규하․남효직․남여명 4명은 소요죄·공무집행 방해죄·건조물 손괴죄·기물 손괴죄·공문서 훼기죄·보안법 위반죄 등 8종목의 죄명을 적용징역 7년을 언도하였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전국 각지에서 약 1700건의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각 시위는 경상북도 영덕군의 영덕과 영해지역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같은 날 같은 주도체가 시위운동을 계획해도 지역의 사회 문화적 배경, 일제의 탄압 강도 등에 의해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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