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박사의 역사이야기] 강화군민 1만명의 만세 함성… 유봉진과 길상결사대원의 활약
[이정은 박사의 역사이야기] 강화군민 1만명의 만세 함성… 유봉진과 길상결사대원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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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유봉진, 강화 남구역 교인 모아
3월 18일 독립만세 부르며 행진
강화 각처에 군중 1만명 이상
독립 위해 모두가 한마음 돼

강화 진위대 장교들. 유봉진은 구한국 진위대 군인출신이었다. ⓒ천지일보 2019.5.3
강화 진위대 장교들. 유봉진은 구한국 진위대 군인출신이었다. ⓒ천지일보 2019.5.3

34살 유봉진(劉鳳鎭)은 전등사에 가까운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1번지에 살면서 은(銀)세공을 업으로 하고 있던 예수교 권사였다. 이전에 구한국 군인이었던 그는 조선독립을 간절히 바라며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자 했으나 안중근 의사에게 선수를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3월 8일 같은 길상면 선두리 출신으로 연희전문학교 2학년생이던 황도문(黃道文)이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를 갖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했다. 유봉진은 외쳤다.

‘기회가 왔다!’

유봉진은 곧바로 황도문과 같이 같은 동리에 있는 길직교회 담임이며 강화 남구역 관리자인 이진형(李鎭亨) 목사 집으로 달려가 이진형 목사와 전도사 황유부(黃有富)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각자 동리를 분담하여 동지로 인정할 만한 자들을 선정하여 “내일 동리 교회당에 모이라.”고 통지했다. 3월 8일, 9일 이어진 모임에는 강화 남구역 교인 여러 명이 더 참가했다. 이날 참석한 사람들은 후에 ‘길상결사대원’의 모체가 되었다.

3월 11일 유봉진 등 지도부는 3월 18일 강화장날을 거사일자로 확정하고, 전 강화도 주민들이 참여하는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했다. ‘독립선언서’ ‘국민회보’ 등의 유인물과 함께, ‘강화인민에게’라는 제목의 유인물도 만들었다. 내용은 “조선인은 거국적으로 독립운동에 열광하고 있다. 우리 강화군에서도 이를 결의하고 독립만세를 외쳐야 할 것이니, 독립만세를 부르면 조선의 독립은 자연히 기약될 터이다.”는 내용이었다. 군민들에게 문서를 돌렸다.

예수교인 장동원(張東元)의 길상면 길직리 집 객실에서는 선두리와 길직리 사람 10여 명이 모여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2, 13일경 지도부는 ‘조선독립선언서’ 및 ‘국민회보(國民會報)’ 등 인쇄물 여러 묶음을 동리 각 곳에 배부하며 “조선독립운동에 참가하라.”고 선전했다. 또한 동리민 제사에도 가서 모인 사람들에게도 강화만세시위에 참석하도록 연설했다. 3월 17일에는 직산리 장윤백 집에서 모여 “각자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을 지휘”하기로 하였다.

강화 읍내 성공회. 외부는 조선식 기와에 내부는 서양식 건물로 독특하다(1906). ⓒ천지일보 2019.5.3
강화 읍내 성공회. 외부는 조선식 기와에 내부는 서양식 건물로 독특하다(1906). ⓒ천지일보 2019.5.3

3월 16일 유봉진은 강화 서쪽 29㎞나 떨어진 주문도(注文島)로 갔다. 그날 밤 주문교회당에 120명쯤이 모였다. 유봉진은 회중 앞에서 설교를 했다.

“파리강화회는 조선의 민정도 돌아본다. 조선인민이 침묵하고 있어서는 안 되니, 크게 독립만세를 불러서 소요를 일으켜야 한다. 나는 그 운동을 위해 결사대원이 될 것이니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다음에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품안에서 종이에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 oo번지 유봉진 독립결사대’라고 쓴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결사대에 찬성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

남녀학생 5~6명이 손을 들었다.

유봉진은 독창으로 찬송가 ‘나의 평생소원은 이것뿐 주님이 하는 일을 완수하고 이 세상과 작별하는 날 주님에게 돌아간다.’를 노래하였다. 유봉진은 주문도에서 1박하고 다음날인 3월 17일 강화로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에 읍내 등지에서는 ‘조선독립선언서’ 외 3종의 문서를 동리민들에게 배부하고, 거사 전날 밤에는 사람들 눈에 잘 띄게 읍내로 가는 노상에 문서들을 살포했다. 신문리에서 숙박업을 하는 김영돈(金永敦, 32세, 예수교인)은 병중임에도 아픈 몸을 일으켜 시위군중이 지나가는 길가 집 처마 끝에다 감추어 두었던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3월 17일 오전 11시경 유희철‧조상문‧황일남‧황윤실‧장명순‧장윤백‧장상용‧장삼수‧방렬이 장동원의 객실에서 결사대를 조직했다. 결사대는 유봉진외 10명이 첫 발기인이었고, 신태의 등 9명이 추가로 가입하여 20명이었다.

3월 18일 강화읍내 장날이 왔다. 유희철·황일남·황윤실·장동원·장명순 등은 각자 태극기를 들고 관헌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시장에 숨어 들어갔다. 시위대 선두에는 길상면 선두리 사는 선원이며 예수교인인 유희철(劉熙哲, 27세)이 ‘조선독립(朝鮮獨立)’이라 쓴 깃발을 들고 섰다. 군중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관청리 방향으로 행진해 왔다.
 

강화 3.1독립운동기념비 ⓒ천지일보 2019.5.3
강화 3.1독립운동기념비 ⓒ천지일보 2019.5.3

강화경찰서 소속 도(道) 경부 기요시 미야스(紀喜美安)는 이렇게 말했다.

“3월 1일 경성 조선독립 선언과 시위 사실이 3월 10일 경까지에는 강화도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3월 18일 장날 독립운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과연 이날 오후 2시 경 갑자기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순사 5명과 같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시장 중앙의 돌다리 부근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온 시장 전체에 모여들어 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고 태극기를 휘두르는 자도 있어 대단한 소동이었다.”

순사보 김덕찬이 선두에 선 유희철을 붙잡아 주재소에 가두어 넣고 다시 시장에 나가 군중을 선동하는 장상용과 조기신을 체포했다. 그는 “3차로 시장에 나가 시장 남쪽 끝에서 큰 종이 깃발을 들고 사람의 깃발을 빼앗았다. 그 기를 들고 있던 사람이 오른손으로 기를 붙잡고 왼손으로 따귀를 쳤다. 뒤에 있던 군중들이 주위로 몰려들어 치고 차고 받고 하여 나는 일어나 칼을 빼어 휘두르며 경찰서로 도망쳐 돌아왔다. 그때 군중들은 이쪽에 1단 저 쪽에 1단이 모여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시위 준비와 독려에 바빴던 유봉진은 2시까지 시위 현장에 도착하기에 늦을 것 같았다. 거사에 차질을 빚어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그는 자택에서 백마를 타고 시장으로 달렸다. 시장에 들어서서 군중들 사이로 말을 타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독립만세를 절규하고, 시장 부근 종루(鐘樓)에 뛰어 올라 큰 종을 마구 침으로써 시위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유봉진은 군중에게 연설을 했다.

“이승만이 파리강화회에서 조선독립운동 중이니 강화회의에서는 독립이 조선인의 희망인가 아닌가를 보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독립만세를 불러야 한다. 나는 이등박문을 암살하기 위하여 그의 보호순사 또는 소사(사환)가 되고자 했으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는데, 나보다 더 위대한 사람(안중근: 필자)이 나와서 나의 희망을 달성하게 되었다. 내일 정오에는 온수리에 모여서 만세를 부르며 점차 각 면을 돌면서 만세를 불러야 한다.”
 

강화교회(1892, 감리교 테일러 선교사 촬영) ⓒ천지일보 2019.5.3
강화교회(1892, 감리교 테일러 선교사 촬영) ⓒ천지일보 2019.5.3

시위군중은 강화경찰서에서 출동한 순사보 김덕찬·염이선·유재면·김순덕 등을 보고 외쳤다.

“너희도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라!”

“안 돼! 그럴 수 없소!”

“무슨 소리야, 너희는 조선 민족이 아니냐!”

시위군중은 분노하여 그들을 때리고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유봉진은 군중을 이끌고 군청으로 가서 군청 앞 높은 단위에 올라서서 열렬한 연설을 하고, 군수 이봉종(李鳳鍾)을 끌어내 “조선독립만세를 같이 부르자!”고 요구하고 “불응하면 청사를 파괴하겠다.”고 압박하였다. 군수 이봉종이 마지못하여 만세를 부르겠다고 하자 유봉진은 군중에게 외쳤다.

“군수가 만세를 부른다!”

그때 누군가가 태극기를 가져다가 군수 손에 쥐어 주고 만세를 부르게 했다.

군중들은 다시 객사‧공자묘를 돌았다. 향교에 이르러 유봉진은 다시 연설했다.

“앞서 시장에서 위의 시위운동 때 강화경찰서에 검속된 피고 유희철·조기신 등의 석방을 요구하자!”

그는 군중을 지휘하여 오후 5시경 경찰서 앞에 쇄도해 갔다. 순사들이 제지했다. 그와 동지들은 제지하는 순사들을 밀쳐내며 경찰서 문 앞까지 압박해 들어갔다. 밀고 밀리는 육박전을 약 3시간이나 계속했다. 그들은 경찰에 요구했다.

“앞서 잡아 가둔 사람 석방하고 시장에서 칼을 뽑았던 김 순사를 쳐서 죽일 터이니 내놓아라! 응하지 않으면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청사를 부수고 빼앗을 것이다!”

시위대는 경찰서로 몰려가서 “체포한 사람을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달려들어 탈환하겠다.”고 하며 작은 돌을 가지고 폭행하려 했다.

경부 기요시 미야스(紀喜美安)은 “군청에 몰려든 군중은 약 5, 6천명이 1단으로 되어 있었다. 또한 군중들은 읍내 각처에도 가득 차서 총 수효가 1만 명 이상인 것으로 인정된다.”고 했다.
 

유봉진, 강화도 만세시위 주도자, 서대문 감옥 감시대상 인물카드 ⓒ천지일보 2019.5.3
유봉진, 강화도 만세시위 주도자, 서대문 감옥 감시대상 인물카드 ⓒ천지일보 2019.5.3

순사들은 시위대열 속의 읍내 사람은 대강 보고서 알고 있었다. 또 읍내 사람이 아니더라도 앞장서서 활동하는 사람은 수첩에 기록해 두었다가 시위가 끝난 후 40명가량을 체포하였다. 1만 명의 대시위를 주도한 유봉진도 체포되어 1920년 3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출판법·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의 부인 조인애(曺仁愛)도 함께 참여했다가 6개월 옥고를 치렀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서울, 평양 같은 대도회지가 아닌 강화도 같은 작은 바닥에서 1만명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강화도 1만 주민의 독립만세 함성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다. 유봉진 같이, 누군가가 있었다. 3.1운동 전체가 다 마찬가지다. 거기에 사람들이 있었다. 적극적이고 열정적이며 신념이 굳센 누군가가 앞장서고 뒤에서 도왔다. 모든 역사의 현장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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