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사(死)의 찬미와 김우진 2
[역사이야기] 사(死)의 찬미와 김우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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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목포문학관을 간다. 거기에는 ‘김우진 관’이 있다. 연보, 육필원고, 생애와 문학, 김우진 작품, 집필실 등으로 꾸며져 있다. 먼저 1926년 8월 5일자 동아일보·매일신보 기사와 ‘돌아오지 못하는 김우진 군의 반생(半生)’ 제목의 8월 6일자 매일신보를 보았다. 그런데 ‘윤심덕’ 이름을 찾기가 힘들다. ‘사의 찬미’ 노래 이야기는 물론 없다. 비련의 주인공 김우진과 윤심덕은 지금도 화제인데, 왜 윤심덕 이름은 없나?

한편 김우진과 윤심덕은 언제 처음 만났을까? 둘은 1921년 7월 ‘동우회 순회연극단’에서 처음 만났다. 1920년 동경에서 조직된 동우회는 동경 유학생들의 연극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와 제휴해 1921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국내순회극단공연에 나섰다.

‘동우회 순회연극단’은 7월 12일부터 8월 18일까지 부산을 시작으로 40일 동안 목포·서울 등 25개 지역을 순회하였고 가는 곳마다 대성황이었다.

연극단의 연출은 김우진이 맡았는데, 그는 국내 순회공연비 일체를 부담했다. 공연작품은 김우진이 번역한 던세니의 「찬란한 문」와 조명희의 창작극 「김영일의 사(死)」 등이었고, 연극 막간에 홍난파의 연주와 윤심덕의 독창도 있었다.

순회공연 이후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하지만 김우진은 부인과 두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윤심덕은 1923년 귀국 후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성황리에 첫 독창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클래식으로만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대중들에게 다가갔다.

1924년 3월에 와세다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김우진은 6월에 목포로 귀향해 집안의 토지와 재산관리를 위해 설립한 ‘상성합명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사장의 역할은 매우 분주하고 고된 일이지만 그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그는 1925년 6월에 ‘오월회’를 결성하고 동인지를 발행하는 등 열성을 보였고, 희곡「이영녀」, 평론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1926년 5월)를 쓰는 등 창작에 매진했다.

1925년 경 김우진은 윤심덕과 만났다. 그는 1925년에 윤심덕을 극단 토월회 주역배우로 주선하기도 했고, 윤심덕이 목포에 내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김우진은 자유로운 삶과 문학적 포부로 인해 부친과 갈등을 겪었다. 결국 그는 1926년 6월 가출해 도쿄로 건너가 친구 홍해성의 집에 기거했는데, 이곳에서 희곡 「산돼지」를 탈고했다.

한편 윤심덕은 오사카에 머무르면서 레코드 취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쿄에 머물던 김우진에게 어느 날 그녀로부터 자살하겠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김우진은 홍해성에게 ‘그녀를 말리러 가겠다’고 알리고 길을 나섰다. 우연히도 소장 유품에서 김우진이 1926년 7월 31에 쓴 일기를 발견했다.

나는 내 이외 사람들의 욕이나 침이나 매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다만 忿(분)한 것은 만일의 『誤解(오해)』뿐이다. 이 기록의 斷片(단편)들이 이것만을 피해주게 하는데 참고가 되면! 一九二六. 七. 三一. 水山.

1926년 7월 31일 기재된 이 일기는 시모노세키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기 3일 전에 쓴 것이다. 이 일기대로라면 김우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오해를 걱정한 듯하다.

그동안 김우진 문학은 윤심덕과의 비련 때문에 가려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의 SBS 드라마 ‘사의찬미’로 김우진이 재조명된 것은 고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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