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사(死)의 찬미’와 김우진 1
[역사이야기] ‘사(死)의 찬미’와 김우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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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천재극작가 김우진의 비극적인 사랑과 함께 김우진의 문학 활동을 재조명한 SBS TV 드라마 ‘사(死)의 찬미’가 작년 12월에 방영되었다.

김우진의 흔적을 찾아서 목포를 간다. 답사할 곳은 북교동 성당과 목포문학관이다. 북교동 성당부터 방문했다. 이곳은 김우진이 살았던 성취원이다. 성취원은 장성군수를 한 김성규가 1903년에 무안감리(목포세관장)로 임명되면서 살던 곳이다.

성당 한 쪽에는 김우진에 대한 표석이 있다.

-극작가 김우진 문학의 산실(1897.9.19~1926.8.4)

이곳은 신문학 초기에 극문학과 연극을 개척 소개한 수산 김우진 선생이 청소년기(1908~1926)에 유달산 기슭을 무대삼은 희곡 「이영녀」 등을 썼던 자리임-

눈에 띄는 것은 김우진의 생몰이다. 김우진은 1897년에 장성군수 김성규와 재취 순천박씨의 장남으로 장성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4세 때 모친이 별세했다.

그는 1908년에 목포시 북교동으로 이사하여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북교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18년에 일본 구마모토 농업학교를 거쳐 1924년 3월에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해 6월에 목포로 귀향해 ‘상성합명회사’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그는 회사 일을 하면서도 창작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1925년에 유달산 밑 사창가의 처참한 생활을 그린 희곡 「이영녀」를 집필했다.

그런데 김우진은 자유로운 삶과 문학적 포부로 인해 부친과 갈등을 겪었고, 결국 1926년 6월에 가출해 도쿄에서 지냈다.

1926년 8월 5일에 신문들은 ‘김우진과 윤심덕의 현해탄 정사’를 부산 발 긴급 전보로 실었다.

8월 5일의 동아일보를 읽어보자.

-현해탄 격랑 중에 청년 남녀의 정사(情死)/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

지난 3일 밤 11시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하던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4일 오전 4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중략) 선객명부에는 남자는 김수산, 여자는 윤수선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본명이 아니라 남자는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 (후략)-

이 사건은 연일 화제였다. “이 소문이 알려지자 모아 앉으면 이야기는 모두 이 방면에 쏠렸다(8월 6일 동아일보).”

8월 7일에는 윤심덕이 오사카에서 레코드 취입을 했는데 ‘사의 찬미’를 불렀다는 기사가 났다. 8월 20일경 닛토 레코드사는 ‘사의 찬미’ 음반을 발매했는데 대박을 터트렸다. 10만장이나 팔렸다. 이러자 레코드 회사가 두 사람을 도피시켰다는 음모설이 나돌았다.

1930~31년에는 이탈리아에 살고 있다는 소문도 퍼지자, 김우진의 동생 김철진은 조선총독부에 확인을 요청했다. 1931년 11월 이탈리아 주재 일본 공사관은 허위사실로 공식확인했다. (「그 때 오늘」 2010.8.3 중앙일보)

이럼에도 1934년에는 “윤심덕씨는 생존, 옥동자를 낳았다”는 기사가 났다. (1934.2.27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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