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이순신장군이 명량에서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과 싸워 이겼다는 것은 세계해전사에 유례없는 쾌거였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하늘이 도왔다’고 적었다. 이런 승리였기에 승전 요인으로 ‘철쇄설’이 등장한다. 명량해협의 가장 좁은 양편에 철쇄를 걸어 일본전선 수백 척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철쇄설’은 사실이 아니다. 그 근거를 살펴보자. 첫째, 명량해전 당시나 직후의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즉 ‘난중일기’나 ‘선조실록’에 관련 기록이 없다. 둘째, 철쇄설은 18세기 후기에 『택리지』와 『호남절의록』에 나오는데 내용이 황당하다. 우선 이중환이 1751년에 쓴 『택리지』를 보면 누가 보더라고 허무맹랑하다. 글을 읽어보자.

임진년에 왜적의 승려 현소가 평양에 와서 의주 행재소에 편지를 보내 “수군 10만 명이 또 서해로 오면 마땅히 수륙으로 함께 진격할 터인데, 대왕의 수레는 장차 어디로 갈 것입니까?” 하였다.

이 때 왜적의 수군이 남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던 참이었다. 그 때 수군대장 이순신이 바다위에 머물면서 쇠사슬을 만들어 돌 맥 다리에 가로질러 놓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왜적의 전선이 다리 위에 와서는 사슬에 걸려, 이내 다리 밑으로 거꾸로 엎어졌다. 그러나 다리 위에 있는 배에서는 낮은 곳이 보이지 않으므로 거꾸로 덮어진 것은 보지 못하고 다리를 넘어 순류에 바로 내려간 줄로 짐작하다가, 모두 거꾸로 엎어져 버렸다. 또 다리 가까이엔 물살이 더욱 급하여 배가 급류에 휩싸여 들면 돌아 나갈 틈이 없으므로 500여척이나 되는 왜선들이 모두 일시에 침몰했고 갑옷 한 벌도 남지 않았다.

이를 보면 이순신의 해전은 임진년(1592년)에 일어난 것으로 적혀 있고, 명량해협은 가장 좁은 폭이 295미터인데 여기에 다리와 쇠사슬을 설치했다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다. 더구나 왜선이 500여척 침몰했다니 너무 황당하다.

한편 1800년에 간행된 『호남절의록』에는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헤라클레스처럼 명량해협을 가로지르는 철쇄를 혼자서 자유롭게 걸고 거두었다고 되어 있다. 이 역시 허무맹랑하다.

“김억추는 정유재란 때 전라우수사가 되었는데 충무공이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하자는 뜻의 격문을 공에게 보내오니 공은 즉시 진도에 가서 만나 여러 방략들을 마련하는 데 많은 힘이 되었다. 쇠사슬을 명량에 가로질러 설치하여 우리 배가 지날 때는 거두고 적의 배가 지날 때는 걸도록 하였는데 쇠사슬이 너무 무거운 지라 여러 장수들 중 아무도 그 일을 해 낼 수가 없었다. 공이 때에 맞춰 걸고 거두는 것을 아주 쉽게 하였으므로 이순신이 그 용력의 절륜함에 탄복하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김억추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9월 8일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에만 적합하고 장수를 맡길 수 없는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하여 함부로 임명하여 보냈다.

셋째, 당시 조선 수군은 철쇄를 설치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순신 함대는 8월 16일 이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여러 번 진을 옮겨, 8월 29일 벽파진에 주둔했는데 이때도 왜군의 공격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양의 철을 주조하여 쇠사슬을 만들어 물살 센 울독목에 설치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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