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평양에서 다시 숙청의 피비린내가 나고 있는 듯하다. 그동안 조용하던 평양에서 들려오는 소식이어서 “역시 그랬구나”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것은 지난 2013년 12월 김정은 위원장의 고모부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숙청 이후 무려 6년 만의 일이어서 더욱 주목되는 현상이다.

북한은 지난 2월 말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의 실무 협상을 맡았던 김혁철 국무위원회 대미 특별대표와 외무성 실무자들을 협상 결렬 책임을 물어 처형한 것으로 5월 30일 알려졌다. 대미 협상을 총괄했던 김영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도 혁명화 조치(강제 노역 및 사상 교육)를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노이 협상 결렬로 충격 받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내부 동요와 불만을 돌리기 위해 대대적 숙청을 진행 중인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 소식통은 이날 “김혁철이 지난 3월 외무성 간부 4명과 함께 조사받고 미림비행장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안다”며 “이들에겐 ‘미제에 포섭돼 수령을 배신했다’는 미제 스파이 혐의가 적용됐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김영철은 해임 후 자강도에서 강제 노역 중”이라며 “김혁철과 함께 실무 협상을 담당한 김성혜 통일전선부 통일책략실장은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졌다”고 했다. 하노이 회담에서 김정은의 통역을 맡았던 신혜영도 결정적 통역 실수로 “최고 존엄의 권위를 훼손했다”며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것으로 알려졌다.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도 근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관계자는 “하노이 회담 이후 김여정의 행적은 포착되지 않는다”며 “김정은이 근신시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이날 “앞에서는 수령을 받드는 척하고 뒤에 돌아앉아서는 딴 꿈을 꾸는 동상이몽은 수령에 대한 도덕·의리를 저버린 반당적, 반혁명적 행위”라며 “이런 자들은 혁명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된다”고 했다. 또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말로만 외우고 심지어 대세에 따라 변하는 배신자·변절자도 나타나게 된다”며 “충실성은 결코 투쟁 연한이나 경력에 기인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노동신문에 ‘반당·반혁명, 준엄한 심판’ 등 숙청을 암시하는 표현이 등장한 것은 2013년 12월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처형 이후 처음이다. 다행이도 이번에는 동상이몽이란 표현만 쓰고 ‘양봉음위’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면 뭔가 숙청 범위가 그다지 큰 것 같지는 않아 천만다행이다.

동상이몽이 한 잠자리에서 다른 꿈을 꾼다는 사고의 차이, 판단의 차이라면 양봉음위는 앞에서는 충성하는체 하면서 뒤에서는 배신을 때린다는 말 그대로 북한 정치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죄목’이다. 하지만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김영철과 김혁철, 그리고 통일전선부 책략실장 김성혜와 통역을 맡았던 신혜영 등이 김정은과 다른 생각을 추호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번 하노이 회담을 총 지휘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명약관화하다. 바로 김정은 위원장이며, 그 아래 또 한 명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있다.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꼭대기부터 아래로 순서대로 내려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은 말 그대로 전지전능의 존재로 여전히 북한을 무소불의로 통치하고 있고, 제2인자 격인 김여정 1부부장은 겨우 ‘근신’ 정도로 처벌받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 근신이지 그저 잠시 어느 특각에 가 아침엔 산책하고 오후엔 꽃구경하는 신선놀음이나 하며 시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과거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 역시 근신할 땐 그런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거야 말로 너무 불공평하고 너무 잔인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김혁철 등은 북한 정권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유능한 외교관들이다. 통역 신혜영도 대관절 국제무대에 처음 나가본 통역이다. 단순한 실수는 반성문 정도로 끝내고 다시금 도전의 기회를 줘야지 무조건 탕 탕 쏴버리면 가뜩이나 뒤떨어진 북한 외교는 누가 끌고 갈 것인가. 비핵화의 앞날이 더욱 암울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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