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냉전이 끝난 지도 수십 년이 흘렀다. 분단과 전쟁의 가파른 현대사의 굴곡을 뒤로 하고 대한민국은 경제기적을 이뤘지만 민족이 하나 되는 민족주의의 대통합은 요원하기만 하다. 물리적으로 공고하게 갈라진 군사분계선과 피눈물을 뿌리는 이산가족들, 사선을 넘어온 탈북민들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용해된 화합의 열매를 따는 일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남북한에는 아직 3년간의 6.25 한국전쟁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운 노병들이 건재하다. 따라서 아직 대통합이란 화합의 쟁점을 쉽게 꺼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6일 현충일 추념식에서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상식의 선 안에서 애국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통합된 사회로 발전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제 사회를 보수와 진보,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며 애국과 통합의 가치를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뒤이어 약산 김원봉을 언급한 것은 추념사 취지에 역행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문 대통령 추념사는 향후 국정 운영의 기조가 통합으로 바뀔 수 있다는 기대를 주기에 충분했다. 정치권의 극한 대립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애국과 통합을 강조한 것은 국정에 대한 야당의 협조를 당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광복군을 이야기하면서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고 말했다. 이어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 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됐다”고 했다. 

우리 현대사에서 김원봉만큼 논쟁적인 인물도 드물다. 일제강점기 청년시절 무장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이지만 광복 후 북으로 넘어가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고, 한국전쟁 중엔 김일성에게서 훈장까지 받았다. 그가 1958년 숙청당했다는 것으로 모든 논란이 불식될 수 없다. 그런 그를 대통령 추념사에서 언급한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더욱이 현충일은 북한에 맞서 산화한 호국영령을 기리는 날 아닌가. 최근엔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여부를 놓고 논란을 빚어 왔다. 그런 인물을 추념사에 등장시킨 것을 청와대 보좌진의 실수라고 보기는 힘들다. 문 대통령이 통합을 힘주어 말하면서 ‘김원봉 언급’을 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다른 날도 아닌 현충일 추념사에 김원봉을 넣은 것은 이념 갈등을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 애국과 통합의 범위를 넓히자는 취지라고 해도 꼭 추념사를 통해 제기해야 했는지는 납득하기 어렵다. 진영 대립을 키우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에 문 대통령은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김원봉이 비록 최후에는 김일성 정권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였지 능동적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대통령의 한마디 한마디가 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다. 공식 행사에서의 대통령 기념사·추념사는 역사에 기록된다. 대통령은 참모들이 써 주는 원고에 대해 심사숙고 하고 내려 읽어야 한다. 현재 문 대통령의 참모들은 대통령을 그런 면에서 잘 못 보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문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진정한 민족주의적 통합이 가능한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것이다. 어제의 인물을 내세워 통합을 말하면서 오늘 이 땅에 자유와 희망을 찾아온 3만 탈북민을 이 정부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정부가 지원하던 예산을 단 한 푼도 남기지 않고 한꺼번에 싹둑 잘라버렸다. 정녕 자르고 싶다면 첫 해에는 30%, 두 번째에 또 30%, 그리고 나머지도 자생력이 생긴 다음에 잘라도 되지 않을까. 왜 그랬을까? 북한 정권에 잘 보이려 했다는 비판을 무슨 말로 변명할 것인가?

우리는 눈앞의 통합도 박살내며 어제의 인물을 내세워 추상적인 통합을 주절거리는 누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통합논의는 통일 이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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