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정약용(丁若鏞)이 강진에서 유배생활하는 동안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를 비롯하여 500여권에 이르는 책을 저술했는데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해배(解配)가 되어 고향 마재로 귀환하게 됐는지 그 해당 내용을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인용한다.

“무인년(57, 1818) 여름 응교 이태순이 상소하여 ‘정계가 되었는데도 의금부에서 석방 공문을 보내지 않는 것은 국조 이래 아직까지 없던 일입니다. 여기서 파생할 폐단이 얼마나 많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정승 남공철이 의금부의 여러 신하들을 꾸짖으니 판의금 김희순이 마침내 공문을 보내어 내가 고향으로 풀려 돌아오니 가경 무인년(순조 18, 1818) 9월 보름날이었다.”

사암(俟菴)이 마재로 귀환한 그 이듬해 봄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감회가 새로운 뱃길이었다.

이와 관련해 35년 전인 정조 8년(1784) 음력 4월 15일, 큰형수 경주이씨(慶州李氏)의 기제(忌祭)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이 뱃길에서 이벽(李檗)에게 천주교에 대해 처음 들었던 것이다.

사암은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충주에 있는 선산에 성묘했으며, 경진년(59, 1820) 봄에 배를 타고 산수를 거슬러 올라가 춘천과 청평산 등지를 유람했다.

1822년(순조 22)에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완성하였는데 사암의 3대저서중의 하나로 알려진 책이며, 재판을 하는데 필요한 목적으로 저술하였으며, 본래의 서명은 명청록(明淸錄)이었으나 후에 흠흠신서로 고쳤다.”

한편 사암은 귀환 4년 후인 1822년(순조 22)에 회갑(回甲)을 맞이하며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었는데 해당 내용 일부를 인용한다.

“나는 건륭 임오년(1762)에 태어나 지금 도광의 임오(1822)를 만났으니 갑자가 한 바퀴 돈 돌이다. 뭐로 보더라도 죄를 회개할 햇수다. 수습하여 결론을 맺고 한평생을 다시 돌이키고자 한다. 금년부터 정밀하게 몸을 닦고 실천하여 하늘이 준 밝은 명을 살펴서 여생을 끝마치려 한다. 그리고는 집 뒤란의 자좌(子坐: 정북(正北) 방향)를 등진 언덕에 관 들어갈 구덩이의 모형을 그려 놓고 나의 평생의 언행(言行)을 대략 기록하여 무덤 속에 넣을 묘지(墓誌)로 삼겠다.”

사암이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지은 이유는 단순히 지난 인생을 뒤돌아보고자 하는 의도만은 아니었으니 그는 자신의 생애가 왜곡되어 후세에 전해질 것을 염려하여 제3자가 아닌 자신이 직접 그 인생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것이다.

사암은 두 본(本)의 자찬묘지명을 지었는데 하나는 집중본(集中本)이고 다른 하나는 광중본(壙中本)이었는데 특히 광중본은 무덤 속에 넣기 위한 축약본(縮約本)이었다.

한마디로 사암은 자찬묘지명에 자신의 삶이 미화되거나 격하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해지기를 원하였으니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후세를 향해 지은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하늘을 향해 지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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