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30)
[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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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정약용(丁若鏞)이 1823년(순조 23) 9월 28일 승지(承旨) 후보로 낙점되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얼마 후에 취소됐다.

1827년(순조 27) 10월에 윤극배(尹克培)가 사암(俟菴)을 무고(誣告)하는 것이 끝이 없었는데, 그해는 효명세자(孝明世子)가 대리청정(代理聽政)하던 첫해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사암을 신임하였던 효명세자는 사암을 등용하고 싶었으나 노론이 윤극배의 상소를 통해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승정원(承政院)에서 상소를 올리지 않자 윤극배가 승정원에 직접 나아가 아뢰었으며, 그를 국문한 끝에 사암이 무고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로부터 3년 후가 되는 1830년(순조 30) 5월 초5일에 약원(藥院)에서 탕제(湯劑)의 일로 아뢰어 부호군(副護軍)에 단부(單付)됐는데, 그해 효명세자의 환후(患候)가 오랫동안 회복되지 못하여 약원에서 아뢰어 약을 논의할 것을 청했다.

사암이 명(命)을 받들어 들어가 진찰하니 환후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약을 달여 올리기로 하였으나, 미처 올리기도 전에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니 초6일이었다.

1836년(헌종 2)은 사암이 75세가 되면서 2월 22일이 회혼례(回婚禮)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이러한 경사스런 날 진시(辰時)에 정침에서 생을 마치게 되니 파란만장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서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참변을 당한 1762년(영조 38)에 출생하여 어린 시절 신동(神童)의 명성을 들었던 사암이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정조가 의문의 승하를 한 이후 정국이 급속도로 돌변하여 결국 신유박해(辛酉迫害)라는 참사가 발생했으며, 사암의 형제들은 천주교와 관련해 투옥되기에 이르렀다.

셋째 형 정약종(丁若鍾)은 서소문밖에서 장렬한 순교(殉敎)를 했으며, 정약용(丁若鏞)과 중형(仲兄) 정약전(丁若銓)은 유배생활을 하게 됐다.

처음에 사암(俟菴)은 기장, 손암(巽庵)은 신지도로 유배를 떠났으나 조카사위 황사영백서 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돼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은 이후 사암은 강진, 손암은 흑산도로 유배가게 됐다.

이와 관련해 사암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하면서 500여권에 이르는 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며, 손암은 해배(解配)되지 못하고 흑산도에서 운명하기에 이르렀다.

사암은 마침내 강진 유배생활을 마치고 1818년(순조 18) 고향 마재로 귀향했으며, 그로부터 18년 후가 되는 1836년(헌종 2) 2월 2일 진시(辰時)에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끝으로 본 칼럼을 30회에 걸쳐서 연재할 수 있었던 것을 보람있게 생각하며,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 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의 고귀한 생애가 우리사회에 널리 전파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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