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27)
[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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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정약용(丁若鏞)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중이던 1814년(순조 14) 약암(約菴) 이재의(李在毅)의 아들 이종영(李鍾英)이 영암군수로 재임 중에 있었는데 약암이 사암(俟菴)이 강진에서 유배중인 사실을 알게 되어 다산(茶山)으로 직접 찾아가서 만났다는 것이니 그 열정이 대단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약암의 가문을 간략히 소개한다면 본관은 전주(全州)로서 증조부 이주국(李柱國)은 정조의 신임을 받아 어영대장을 비롯하여 훈련대장, 좌우 포도대장, 형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약암도 진사시(進士試)까지는 합격했으나 대과는 응시하지 않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여행다니면서 주역(周易)에 심취했다.

약암은 노론계 출신이기에 당시의 사회풍토로 볼 때 전혀 당색이 다른 남인계 출신의 학자 사암을 만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러한 당파적인 문제를 초월하여 같은 학자의 입장에서 대화를 하고 싶어 사암을 만났다고 하니 이 또한 특별한 인연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정조의 최측근이었던 사암이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인해 유배의 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혀 생각지 않았던 노론계 학자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다산까지 직접 왔으니 내심 놀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사암과 약암이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약암이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하루밤 묵었다는 사실을 통하여 대화가 잘통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암이 1762년(영조 38)생이고 약암이 1772년(영조 48)생이니 연배 상으로 볼 때 사암이 약암보다 10세 연상이라 할 수 있는데 두 학자의 인연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사암은 약암의 아들인 이종영에게 서간(書簡)을 보내어 목민관(牧民官)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길에 대하여 설명하기도 하였으니 두 학자간의 우정의 깊이가 어떠하였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사암은 약암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여러차례 서간(書簡)을 교류하면서 그 인연을 계속 이어갔으며, 특히 1818년(순조 18) 강진에서 해배(解配)되어 고향 마재로 귀환한 이듬해에 약암과 함께 문암산장(文巖山莊)에 머물렀다.

이와 관련해 문암산장을 소개한다면 1787년(정조 11) 정약용이 정약전(丁若銓)과 동행해 구입한 별장이었으며, 그 위치는 현재 양평군 수종면 수입리 일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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