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28)
[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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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807년(순조 7) 정약용(丁若鏞)이 후계자(後繼者)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정학초(丁學樵)가 17세라는 젊은 연령으로 세상을 떠난데 이어서 그로부터 9년후인 1816년(순조 16) 6월 6일 정약전(丁若銓)이 향년(享年) 59세를 일기(一期)로 우이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암(俟菴)은 평소 손암(巽庵)을 형(兄)이면서 동시에 뜻이 통하는 지기(知己)같이 생각했는데 당시의 심정을 자신이 직접 지은 ‘선중씨(先仲氏) 정약전(丁若銓) 묘지명(墓誌銘)’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오호라,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인 데다 겸하여 지기까지 되어 주신 것도 또한 나라 안에서 한 사람뿐이었다”라고 쓸 만큼 사암(俟菴)에 대한 손암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손암마저 없는 상황에서 사암은 학문에만 전념했으며, 그러한 구체적인 결실이 1817년(순조 17) 40권으로 완성된 방례초본(邦禮草本)인데 뒤에 경세유표(經世遺表)로 서명(書名)을 수정했다.

사암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경세유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경세유표는 어떤 내용인가. 관제·군현제·전제·부역·공시·창저·군제·과제·해세·상세·마정·선법 등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해서 현재 실행 가능 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경을 세우고 기를 나열해‘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개혁해 보려는 생각’에서 저술한 책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 경세유표는 한마디로 국가 개혁을 위한 사암의 청사진(靑寫眞)을 제시한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국가의 개혁을 제시한 경세유표에 이어서 1818년(순조 18) 봄에 목민심서(牧民心書) 48권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해 사암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소개한 목민심서의 내용을 인용한다.

“‘목민심서’는 어떤 내용인가. 지금의 법을 토대로 해서 우리 백성을 다스려 보자는 것이다. 율기.봉공.애민의 세가지를 기로 삼았고, 이·호·예·병·형·공을 여섯 가지 전으로 만들어 진황한 단원으로 끝맺었으며, 하나의 조목마다 6조를 포함케 하였다. 고금의 사례를 찾아 배열하여 간악하고 거짓된 것을 들추어내어 목민관에게 보여줌으로써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입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마음이었다.”

사암은 이러한 목민심서를 통하여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목민관의 자세를 심층적으로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목민심서는 실학자로서의 사암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저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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