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9.21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9.21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

최시형(1827~1898)은 1861년 동학교도가 된 후 최제우의 뒤를 이어 제2대 교주가 되었다. 조선 조정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된 후 최시형은 관헌의 감시를 피해 다니며 동학의 교세 확장에 힘썼다. 또한 동학 조직을 강화하는 데 힘써 종교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후 교세가 확장되자 최시형은 1892년부터 교조의 신원(伸寃)을 명분으로 한 합법적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984년 1월 10일 전봉준이 고부군청을 습격한 것을 시작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으며, 9월 전봉준이 다시 봉기하자 신도들이 적극 호응해 무력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개입으로 1894년 12월 말 동학운동이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진력했으며, 1897년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 6월 2일 교수형을 당했다.

사진을 보면 동상에 의한 여독으로 발이 퉁퉁 부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상투도 잘려 있다. 곤장을 맞은 여독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누군가 뒤에서 몸이 지탱할 수 있도록 겨드랑이 부분에 손을 넣어 받쳐주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옷고름 부분이 뒤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데서 추정할 수 있으며, 왼쪽 소매 부분에 다른 소맷자락이 살짝 보이는 데서도 유추할 수 있다.
 

조선 말기 관료 김홍집(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9.21
조선 말기 관료 김홍집(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9.21

조선 말기 관료 김홍집

김홍집(1842~1896)은 조선 말기의 관료이자 정치가로 1867년(고종 4) 경과정시(慶科庭試) 문과에 급제한 이듬해 승정원사변가주서(承政院事變假注書)에 임명됐다.

김홍집은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동학농민운동, 아관파천 등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네 번이나 총리대신직을 맡아 국정을 총괄했던 인물이다.

또한 김홍집은 청나라의 통리아문을 모방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외교통상 업무를 전담했다.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에 설치된 관청으로 개항 후의 대외 통상에 대응해 국가의 외교와 군사제도 등을 근대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업무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김홍집은 1882년 봄 조선이 미국, 영국, 독일 등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맺을 때 전권대신들의 부관으로 협상의 실무를 담당했다.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직후 고종의 밀명에 따라 정식 재판 없이 경무청 순사에 의해 격살된 뒤 시신이 짓이겨지는 최후를 맞았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다른 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조선 백성의 손에 죽는 것이 떳떳하다. 그것이 천명이다.”

성난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김홍집의 마지막 말이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