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1855~1895)이 압송당하는 장면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10.3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1855~1895)이 압송당하는 장면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10.3

전봉준 압송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1855~1895)이 압송당하는 장면으로 사진 우측에는 ‘동학당가형’이라는 한자가 쓰여 있다.

전봉준은 1890년경에 동학에 입교했으며,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됐다. 그가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동학이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해서였다.

농민 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됐다. 그의 아버지 역시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1894년 농민들의 봉기로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갔으며, 이를 대신해 조정은 장흥 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용안 현감 박원명을 고부 군수로 임명해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이용태가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리며 체포와 분탕, 살해를 일삼자 격분한 농민들이 다시 봉기하게 됐다.
 

고종과 마지막 대신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10.3
고종과 마지막 대신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10.3

고종과 마지막 대신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조선의 황실은 왕실로 격하되고 사실상 그 명목만 유지하게 됐다. 사진은 고종과 마지막 대신들이 덕수궁 준명당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준명당은 1897년 광무(光武) 원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종의 침전으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고종이 거쳐하면서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쓰이기도 했으며, 고종과 순종의 어진(御眞)을 이곳에 봉안하기도 했다.

준명당의 ‘명’을 밝을 명(明)이 아닌 눈 목(目)과 달 월(月)이 합쳐진 글자인 밝게 볼 명(眀)으로 사용한 것에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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