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요즈음처럼 신문이 진보와 보수로 극명하게 갈린 시기도 없다. 중도를 표방하는 신문도 있으나 양극화 되어 그 목소리가 다르다. 민심도 여기에 편승, 극도로 호불호(好不好)가 갈린다. 

이런 와중에서 한국 신문은 제 본령을 찾고 있나. 제대로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진정 언론으로서 제대로 가고 있는가. 민족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이런 질문을 던질 때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언론은 몇이나 될까. 

필자가 처음 신문사에 입사, 수습 과정을 밟을 때부터 기자는 비판이 생명이라고 배웠다. 항상 진실 편에 서야 한다고 귀가 따갑게 들었다. 여러 언론들의 목소리도 하나였다. 오보에 대한 사회적 책임도 컸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사안을 가지고도 양 편 주장이 다르다. 네 편 내 편이 되어 때로는 진실을 호도한다. 비판의 강도마저 다르다. 독자들도 양분되어 국론은 더욱 분열되고 있다. 상호간 적의에 가득 차 삿대질을 서슴지 않는다. 국민통합을 위한 아량이나 비전을 잃고 있다. 오보를 해도 아님 말구 식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춘추대의’니 ‘춘추필법’이니 하는 소리를 하는 신문도 없다. ‘술이부작(述而不作: 사실대로 기록하고 창작하지 않는다)’이라고 하는 역사기록정신을 말하는 언론인들도 얼마 안 된다. 이 같은 올바른 정신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된 것인가. 

권력에 편승하면 그것은 죽은 신문이다. 권력을 지켜주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비리를 숨겨 주면 결국 외면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권력지향 언론, 언론인의 생명이 짧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한국 신문들은 지금 깊은 사색으로 언론의 본령을 찾아야 한다. 

신문 산업은 지식산업이다. 활자로 인쇄돼 나온 신문은 최고의 지성인들과 전문가들이 집합해 만드는 지적결정체다. 삶의 질을 높여줄 정보와 지식의 보고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종이신문의 종언을 예측하는 이들도 있으나 필자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신문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종이시대가 쇠퇴해도 모바일이나 새로운 매개체로 독자에 접근하는 방법이 강구되고 있다. 지금보다 더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을 이룰지도 모른다. ‘신문 없는 정부보다는 정부 없는 신문을 선택하겠다’는 토마스 제퍼슨의 명언처럼 국민들은 신문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신문은 또 어떤 모양을 갖춰야 하며 어떻게 독자들과 대화해야 하는 가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곧 닥칠 인공지능시대 신문은 어떤 모습으로 대응해야 할까. 지금 세계 언론에 부여된 과제다.   

천지일보가 창간 9돌을 맞았다. 천지일보는 그동안 중도를 표방하며 한쪽에 치우침 없는 보도로 일관해 왔다. 팩트를 중시하며 권력의 중심 까지 비판, 주목을 받기도 했다.  

‘왜곡되고, 편협되고, 치우치고, 기울어진 세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팩트(fact)’, 즉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며…(중략)… 우리의 생각과 사상과 의식이 무엇인가에 사로잡히고 병들어 허무한 데 굴복당해 있는 현실이 그 원인이라면, 이를 알리고 깨닫게 하는 것이 또 그 사명일 것이다.’

발행인의 칼럼에 나타난 이 글은 필자에게 진보 보수로 양분된 한국 언론에 보내는 고언으로 들려온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 신문이 지향해야 할 목표이자 가치다. 

한쪽에 기울어져 특정세력을 옹호하고 이익집단의 대변자가 된다면 이는 바른 신문이 아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추상같은 의연함이 있어야 한다. ‘찬 서리가 내려야 고절함을 알 수 있다’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歲寒圖)를 음미해보자. 온갖 압력과 회유에 맞서 오로지 국민에 편에 서는 신문이 진정한 언론이다. 내년으로 10주년이 되는 천지일보의 지금 같은 정론과 비상(飛翔)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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